군사정부 홍보 필요했던 박정희, 라디오 시대를 열다

한겨레 2021. 1. 6.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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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0년은 코로나19 때문에 재난 문자에 익숙해진 한 해이기도 했다.

당시 금성사에서 최초의 국산 라디오 설계를 담당했던 김해수에 따르면 박의장이 전자산업 융성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물었고 이에 본인이 밀수품과 면세품을 막아야 살 수 있다고 대답했다 한다.

(최초의 국산 라디오 탄생에 얽힌 비화는 김해수의 회고를 딸인 김진주가 정리한 책 '아버지의 라듸오'에 잘 서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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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준의 과거창][박상준의 과거창]
5·16쿠데타 후 '농어촌 라디오보내기 운동'
활로 못찾던 첫 국산 금성라디오에 길 터줘
1958년의 라디오 상점 모습. 서울SF아카이브

지난 2020년은 코로나19 때문에 재난 문자에 익숙해진 한 해이기도 했다. 사실상 청소년 이상 연령층의 국민 거의 모두가 휴대폰을 가지고 있으니 경고 메시지 전달 체계만큼은 역사상 가장 잘 갖춰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 휴대폰이 나오기 전에는 공공의 목적으로 긴급한 정보를 알리기 위해 어떤 수단을 썼을까?

정보 전달이 얼마나 빠르게 이루어지는가를 기준으로 보면 근대 이전에는 봉화가 최고의 속보 수단이었을 것이다. 다만 담을 수 있는 메시지의 내용은 사전에 약속된 몇 가지로 제한된다는 한계가 있었다.

19세기에 전신기가 발명되면서 비로소 실시간 정보 전달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유선에 이어 전파를 이용한 무선통신이 나왔으며 20세기 초에는 마침내 라디오 방송이 시작되었다. 이를 통해 긴급한 중요 정보를 전국적으로 동시에 전달하는 시스템이 탄생한 것이다.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라디오가 널리 보급되는데 시간이 걸렸다. 20세기 전반기까지는 서민들이 누구나 부담 없이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서 사치품 취급을 받았다. 그 뒤 금성사가 1959년에 최초의 국산 라디오를 출시했지만 당시 시중에는 밀수된 외제 라디오들이 많이 유통되는 바람에 판매 부진으로 계속 적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태 뒤에 박정희가 정권을 잡으면서 상황이 극적으로 바뀐다. 1961년 5월16일에 군사 쿠데타로 집권에 성공한 박정희는 몇 달 뒤에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금성사 라디오 공장을 방문했다. 정부 시책을 적극적으로 홍보할 필요성을 느낀 박정희 정권은 곧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고 동시에 밀수품 단속도 병행했다. 당시 금성사에서 최초의 국산 라디오 설계를 담당했던 김해수에 따르면 박의장이 전자산업 융성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물었고 이에 본인이 밀수품과 면세품을 막아야 살 수 있다고 대답했다 한다. (최초의 국산 라디오 탄생에 얽힌 비화는 김해수의 회고를 딸인 김진주가 정리한 책 ‘아버지의 라듸오’에 잘 서술되어 있다. 김진주와 박노해 부부는 80~90년대에 노동운동가로 유명했는데 김해수는 박정희에게 산업포장 훈장을 받았을 정도로 우리나라 전자산업의 1세대 선구자였기에 부녀 사이의 엇갈린 행보가 관심을 끌기도 했다.)

평상시에는 스마트폰의 기능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라디오는 여전히 재난 상황에서 가장 미더운 정보단말기이다. 기지국도 필요 없고 심지어 광석라디오를 쓰면 전원이 없어도 방송을 들을 수 있다. 전자책의 비중이 아무리 커져도 종이책의 명맥이 끊어질 수는 없듯이 라디오도 절대로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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