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현재에서 드라마 미래를 고민하다

2021. 1. 6.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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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저녁 6시가 되려면 시간이 조금 남았지만,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는 짙은 어둠이 내렸다. 양산 시내를 출발해 굽이굽이 좁은 산길을 달린 지 한 시간이 넘어가고 있었다. 길 끝 저 멀리에 옹기종기 모인 불빛들이 떠올랐다. 촬영장으로 쓰이는 작은 모텔이다. 카메라와 조명이 분주히 오가며 어둠을 걷어냈다. 이곳이 오늘 우리의 목적지, 독립영화 〈내가 누워 있을 때〉(최정문 감독·무니필름 제작·시네마달 공동제작) 제작 현장이다.

영화 「내가 누워 있을 때>」제작진이 촬영하고 있다. / 제작진 제공


커피 한잔과 노동인권

‘우리’는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의 활동가들과 〈두 개의 문〉, 〈공동정범〉 등의 다큐멘터리를 연출한 연분홍치마의 김일란 감독이다. 겨울이 깊어가는 2020년 12월 3일, 세 사람이 이곳을 찾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 이야기를 풀기 위해 먼저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한빛센터)에 대해 짤막하게 이야기해야겠다.

2016년 10월 26일, CJ ENM 이한빛 PD가 숨진 채 발견됐다. 그해 초 입사해 처음 제작에 참여한 드라마 〈혼술남녀〉 촬영이 끝난 뒤였다. 이한빛 PD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 장문의 유서를 남겼다. 그 안에는 자신이 방송제작 현장에서 겪은 부당한 일들이 조목조목 담겨 있었다. 신입 조연출이라는 이유로 떠넘겨진 과중한 업무, 20시간을 넘나드는 초장시간 노동, 거대 방송사에서 제작하는 드라마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 열악한 촬영현장, 방송국 윗선의 입맛에 휘둘리는 프리랜서 스태프들의 불안정한 고용…. 이한빛 PD는 이러한 문제들이 불합리하다는 목소리를 냈다가 ‘직장 내 괴롭힘’에 시달리는 상황이었다.

이한빛 PD의 죽음은 한 번도 조명되지 못한 방송 노동의 어둠을 드러낸 한 줄기 빛이었다. 유가족과 시민사회단체들의 8개월에 걸친 투쟁으로 CJ ENM은 공식 사과했다. 그리고 2018년 1월 24일, ‘이한빛의 생일’에 한빛센터가 태어났다. 다시는 이 같은 죽음이 없도록 미디어 영역 전반의 노동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서다.

영화 「내가 누워 있을 때>」제작진이 촬영하고 있다. / 제작진 제공


한빛센터는 부당노동행위 제보·상담창구인 ‘미디어신문고’를 운영하면서 방송과 미디어 노동 실태를 알리고 개선을 촉구하는 다양한 캠페인을 펼친다. 2019년부터 공익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의 공익단체 지원부문에 선정돼 현장의 목소리에 기민하게 대응하고 사회적 의제로 끌어올리는 활동을 꾸리고 있다.

한빛센터가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들은 방송·미디어 제작 현장의 노동자들이다. 대개 이들은 이른 새벽부터 촬영장으로 향하고, 집에 도착하면 다시 새벽이 되기 일쑤인 생활을 한다. 촬영장 밖을 벗어나기 어려운 방송 노동자들을 만날 방법을 고민하던 한빛센터는 팬들이 촬영 현장으로 보내는 ‘커피차’에서 힌트를 얻었다. 커피차와 함께 제작현장으로 직접 찾아가기로 한 것이다.

주로 드라마 촬영장과 미디어산업이 밀집한 상암동을 찾던 ‘상생커피차 캠페인’이 영화 촬영장을 찾아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영화는 2018년이 돼서야 노조(희망연대노동조합 방송스태프지부)가 생긴 방송 쪽과 달리 2005년부터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이 생기며 활발하게 권리를 위해 투쟁해온 역사가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2015년 ‘영비법(영화 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며 영화 스태프들의 ‘노동자’ 지위가 법적으로 인정되었다. 이후 노동환경이 상당히 개선되었다는데, 드라마 촬영환경과 실제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한빛센터와 연분홍치마가 올해 함께 만들어 배포한 ‘성소수자 친화적인 미디어 제작 환경을 위한 가이드라인’이다. 미디어 제작 현장에서 일하는 성소수자 스태프의 인권 옹호를 위해 두 단체는 올여름부터 ‘스탠바이큐(stand-by Q)’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스탠바이큐’는 성, 성적 지향, 성별, 성적 정체성에 따른 차별금지를 명시한 〈넷플릭스〉의 가이드라인을 참조해 국내 현장에 맞춘 10가지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구급차가 있는 현장이라고?

「내가 누워 있을 때」 제작진은 혹시 모를 부상에 대비해 구급차를 불렀다. 그 옆으로 한빛센터가 마련한 커피차가 보인다. / 한빛센터 제공


〈내가 누워 있을 때〉는 ‘스탠바이큐’의 가이드라인을 처음 적용한 곳이다. 스태프가 늘 소지하는 콘티북을 펼치면 가장 먼저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이 만든 ‘영화계 내 성희롱 예방을 위한 생활수칙’과 함께 등장한다. 이 가이드라인은 그저 장식용일까? 그렇지 않다면, 이 현장은 무언가 다를 것인가?

커피차가 가동을 준비하는 사이, 저 멀리서 다른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구급차였다. 김한솔 PD에게 왜 구급차가 왔는지 물어보았다. “복도에서 대치하는 신을 촬영하는데, 아무래도 물리적 힘이 가해지는 상황이다 보니 혹시 있을지 모를 부상에 대비해 부른 겁니다.”

장담컨대 방송현장에서는 흔한 모습이 아니다. 자칫 잘못하면 크게 다칠 수도 있는 차량 액션 장면을 찍어도 구급차를 부르기는커녕 안전관리자도 없다. 심지어 스태프에게 ‘황산’을 맨손으로 다루게 한 일도 있다. 2017년, tvN 드라마 〈화유기〉 촬영장에서는 한 스태프가 제작진의 지시로 무리하게 샹들리에를 천장에 달다가 추락해 하반신이 마비됐다. 사고가 빈번하지만 ‘프리랜서’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산재보험의 혜택을 받기도 어렵다. 근로계약서 1장 쓰지 못해 노동자로 인정받는 일부터 싸워야 한다.

이날 촬영은 밤부터 새벽까지 이어졌다. 혹시 적정 노동시간 초과는 아닐까? “대신 촬영을 오후 늦게 시작했어요. 모텔 전층을 촬영장 겸 숙소로 빌려 찍고 있어서 출퇴근으로 소모되는 시간도 없게 했죠.”

〈내가 누워 있을 때〉를 공동 제작하는 ‘시네마달’ 김일권 대표의 말이다.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이 2005년 창립부터 주장해온 ‘1일 근로시간 12시간, 1주 근로시간 52시간’은 2015년 영비법이 개정된 전후의 ‘영화 노사정 이행협약’ 함께 점차 영화 촬영현장에서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제작비 10억 미만의 ‘저예산’ 영화는 이행협약 대상에 제외돼 있다. 일부 독립영화는 이러한 조항을 악용하기도 한다.

〈내가 누워 있을 때〉는 제작비 2억여원의 ‘작은’ 현장이다. 그런데도 노동시간 준수는 물론 표준근로계약서 체결도 필수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예산 부족’이 노동권 침해의 핑계가 될 수는 없음을 보여주는 현장이다.

김 PD는 할리우드영화 〈블랙팬서〉 촬영장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 “예산의 차이가 크겠지만, 그쪽에서는 스태프 복지와 일하는 시간은 철저하게 지켜요. 촬영장 안에 일정 간격으로 화장실과 스태프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하죠. 그때 기억을 참고해 이번 촬영에도 그런 부분을 신경 썼어요.”

‘스탠바이큐’의 가이드라인이 포함된 콘티북 / 한빛센터 제공


화장실과 휴게공간은 기본 사항 같지만, 의외로 지켜지지 않는 곳이 많다. 한빛센터에는 최근 간이화장실 하나 없는 촬영현장에서 100여명의 스태프가 온종일 일해야 했다는 제보를 받은 일도 있다. 상업영화도 오랜 시간 ‘제작비 상승’을 이유로 영화노조의 노동환경 개선 요구를 귀담아듣지 않았다. TV 드라마 1편 제작비보다 적은 예산으로 제작되는 독립영화가 노동환경을 인권적으로 만드는 것이 쉬웠을까. 김 PD에게 자세한 사정을 들어보았다.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에요. 우리도 힘들죠. 저는 10여년 전부터 영화현장에서 일했어요. 그때는 훨씬 열악했죠. 시키는 일 똑바로 안 한다고 선배들이 마구 폭언도 하고요. 그런 일들을 겪다 보니까 ‘힘들어도 지킬 것은 똑바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감독이나 PD 혼자서만 영화를 만드는 게 아니니까요.”

지킬 것은 지키려는 노력은 촬영장의 문화를 바꿨다. 〈내가 누워 있을 때〉 촬영장은 감독을 비롯해 여성 스태프와 출연진의 비중이 높았고, 스태프 사이도 훨씬 수평적이었다. 조명감독인 ‘앨리스’씨는 콘티북에 실린 ‘스탠바이큐’의 가이드라인이 그저 장식용이 아님을 보여주는 존재다. 앨리스씨는 MtF(male to female·남성에서 여성) 트랜스젠더다. 23년차 실력 있는 조명감독이지만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제작 현장에서 배제당한 경험이 있다.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현장에서 앨리스씨는 조명감독으로서의 실력을 발휘하는 데 더 집중할 수 있다.

노동자의 목소리에서 변화가 시작된다

커피차 앞으로 삼삼오오 모인 스태프 중 방송현장을 경험한 이들이 있어 두 현장의 차이를 물었다. 가장 큰 차이로 꼽은 것은 ‘여유’다. 쫓기지 않고, 충분히 휴식하고 일할 때, 일에 대한 긍지와 전문성이 높아지는 건 당연해 보였다.

불과 5년 전만 하더라도 방송과 큰 차이가 없거나, 더 열악하기도 했던 영화 촬영현장은 크게 바뀌고 있다. 그러나 방송은 2017년 방송작가유니온(전국언론노동조합 방송작가지부), 2018년 희망연대노동조합 방송스태프지부가 창립하며 노동권 쟁취를 위해 움직이고 있지만 갈 길이 멀다.

한빛센터가 KBS 드라마 「영혼수선공」 제작현장에 보낸 커피차와 방송노동자 권리 보장을 외치는 사람들 / 한빛센터 제공


영화사보다 훨씬 크고 공영성을 지닌 방송사들은 노동인권 개선을 위한 노력에는 소극적이다. 영상 장르 간 경계가 흐릿해지는 경향 속에서 최근에는 영화제작사들이 드라마 제작에 뛰어드는 일이 많아졌다. 영화현장에서는 당연했던 근로계약서 체결, 일일 근로시간 12시간 제한이 방송현장이라는 이유로 무시되는 일이 최근 한빛센터로 여러건 제보되었다. 한빛센터의 고민은 더 커지고 있다.

‘상생커피차 캠페인’은 현장을 향할 때마다 매번 200~300잔의 음료를 준비한다. 2020년에는 특히 코로나19가 확산하던 초기 방역물품이 모자랄 때 마스크와 손소독제도 지원했다. 비용이 상당히 드는 활동이다. 공공상생연대기금의 지원이 없었다면 일회성 활동으로 그쳤을 것이다. 현장의 목소리를 드러내고 결집하는 활동에 대한 다양한 지원이 절실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법제도 개선이다.

〈내가 누워 있을 때〉 촬영장에 함께했던 한빛센터의 또 다른 활동가는 바로 고 이한빛 PD의 아버지, 이용관 이사장이다. 지금 고 김용균씨의 어머니와 함께 차가운 국회 돌계단 위에서 곡기를 끊고 농성 중이다. 외치는 것은 단 하나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제정하라.” 어떤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도, 일하다 다치지 않고 죽지 않게. 이 글이 독자들에게 가닿을 즈음이면 법이 제정되고 이한빛 PD의 아버지가 다시 한빛센터로 돌아오셨기를 바란다.

성상민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기획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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