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셔츠-죽음 예정된 단역들의 좌충우돌 모험 [장르물 전성시대]

2021. 1. 6.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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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서구권에서 ‘레드셔츠’는 오래된 농담으로 통한다. 본디 〈스타 트렉〉 시리즈에서 직책에 따라 다른 색 셔츠를 입은 승무원 중 유독 빨간 셔츠를 입은 말단 대원만 사망하던 클리셰에서 유래한다. 처음 오리지널 시리즈에서 빨간색 셔츠를 입은 이들은 대부분 전술 요원이나 엔지니어, 즉 엑스트라였다. 그리고 이들은 엔터프라이즈호가 새로운 행성에 도착할 때마다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지표인 양 사망했다. 그밖에 불의의 사고 또한 온전히 이들의 몫이었고.

<레드셔츠> 한국어판 표지 / 폴라북스
반면 노란 셔츠를 입은 지휘관이나 파란 셔츠를 입은 과학자들은 사태를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해 이를 앞장서 수행해야 하기에 죽음은 당연하다는 듯 ‘면제’됐다. 즉 레드셔츠란 죽음이 예정된 단역을 가리킨다. 그것도 주인공과 시청자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 없이 ‘개죽음’하는 캐릭터.

SF작가 존 스칼지는 2005년 〈노인의 전쟁〉으로 데뷔해 2013년 〈레드셔츠〉로 휴고상을 처음 품에 안았다. 〈레드셔츠〉는 예고된 죽음을 자각한 레드셔츠들의 좌충우돌을 그린 일종의 메타픽션으로 우주 어드벤처 장르의 클리셰를 유머러스하게 ‘저격’한다. 우주연맹의 함선 인트레피드호에 배속된 달 소위는 함 내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분위기를 일찌감치 감지한다. 선임들은 신입들을 대놓고 소모품 취급하는가 하면, 오로지 함장과 과학주임, 항해사 같은 장교들을 피해 몸을 숨기는 데만 골몰한다. 장교를 만나면 전문 분야와 무관히 임무에 차출되고 곧 그의 사망 소식이 들려오는 걸 너무나도 많이 접한 탓이다.

그렇다고 유명한 클리셰를 빌려 단지 이를 조롱하는 데 그치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그만큼 달 소위 일행이 상황을 인지하고 적극적으로 생존을 모색하는 과정은 무엇보다 정교한 위트를 앞세운다. 미지의 박테리아를 박멸할 약품을 만들어내는 것은 영문을 알 수 없어 그저 ‘박스’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존재다. 무작정 여기 넣고 땡 소리가 나길 기다리면 어처구니없게도 박스는 정확한 결과물을 내놓는데 그 원리는 누구도 이해할 수 없다. 케렌스키 대위는 늘 고난을 도맡는 주역 캐릭터인 덕분에 죽을 염려는 없지만 벌써 사경만 수차례 넘겼다. 교전 중 손상을 입는 건 언제나 6번에서 12번 사이 갑판이다. 함교에서 적당히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폭발만큼 드라마틱한 위기가 또 어디 있겠는가. 이윽고 장교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아예 함선에 숨어 살던 이는 ‘각본’을 조심하라며 달 소위에게 경고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누군가가 만들어낸 TV드라마의 세계, 즉 허구라는 사실마저 확증되면서 이들은 블랙홀을 넘어 2013년 〈스타 트렉〉이 존재하는 우리의 현실로 진입해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자 한다(그냥 시간여행을 하면 죽을 게 뻔하기 때문에 케렌스키 대위를 데려가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드라마의 제작자와 각본가, 심지어 자신을 연기하는 배우와도 만나 서로 픽션의 존재를 인정하고 현실의 벽을 허물며 마침내 자구책을 마련한다.

특히나 레드셔츠들의 모험이 마무리된 후 덧붙는 3개의 에필로그는 가히 이 작품의 백미라 할 만하다. 가공의 세계를 창조했으나 오히려 그의 절대적 영향하에 놓인, 현실세계 3명의 이야기는 뫼비우스의 띠를 그리듯 각자 서로의 자유의지를 주고받으며 마침내 허구의 경계마저 초월한다. 그야말로 재치와 기지로 무장한 픽션의 재미를 안팎으로 응원하는 작품답다.

강상준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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