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군부가 덮은 '해경72정 침몰'..기약없는 인양에 유족 '눈물'

박수혁 2021. 1. 6.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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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12 한달여 뒤 사고
승조원 17명 전원 실종 됐지만
신군부 보도통제로 외면당해
세월호 계기 인양 목소리 커져
재작년 고성 부근서 추정선체 발견
유해수습 등 예산 205억 국회 전액 삭감
유족들 "순직자 찾기 허송세월"
해경 "올해 예산 다시 신청 계획"
해경 72정에 탑승했다가 침몰한 승조원 모습. 유가족협의회 제공

1980년 1월23일 새벽 5시20분 동해안 최북단인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동쪽 4㎞ 해상. 경찰관 9명, 전경 8명이 타고 있던 60t급 해경 경비정 72정과 200t급 경비함 207함이 충돌했다. 기상 불량과 72정의 항해장비 고장에 따른 항로 착오가 일으킨 사고였다. 72정은 침몰했고, 승조원 17명도 전원 실종됐다.

요즘 같으면 연일 뉴스 들머리를 장식할 만한 사고였지만, 이 사건은 조용히 ‘처리’됐다. 1979년 12·12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잡은 지 한달 남짓밖에 안 된 신군부는 사고가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지는 걸 원치 않았다. 보도통제 속에 신문과 방송 등으로부터도 외면당했다. 34년이 지난 뒤 일어난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관심이 환기되면서 2019년 바닷속에 주저앉아 있는 72정을 찾아냈지만, 그게 끝이었다.

■ 군사작전하듯 덮고 넘어간 ‘72정 사건’

해경 72정이 침몰하자, 당국은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주검도 없이 영결식을 치렀다. 해상수색 작업도 제대로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유가족들은 철저히 분리됐다. 침몰 소식을 듣고 전국에서 몰려든 유가족들은 서로 만나지 못하도록 감시당했다. 유가족마다 담당 경찰관이 배치됐고, 숙소도 따로 배정됐다. 경찰은 유가족들이 각자 집에 돌아갈 때까지 따라붙었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요구 등 집단행동을 차단하기 위한 의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가족들은 속으로만 화를 삭여야 했다. 당시 전경으로 72정에 타고 있던 형(강철구·당시 26살)을 잃은 강택윤 ‘해경 72정 유가족협의회’ 부회장은 “아버지는 한평생 ‘시국이 좋아져서 형 주검이라도 건졌으면 여한이 없겠다’는 말만 하시다 화병 때문인지 간경화로 돌아가셨다. 여든네살이신 어머니도 죽기 전에 형 주검이라도 건져달라는 게 마지막 소원”이라며 “당시 고등학생이었는데 전두환이 무서워 제대로 된 설명도 듣지 못한 채 의혹 제기는커녕 항의도 제대로 못 한 채 돌아왔다는 어른들의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72정 정장(선장)이었던 김정곤 경감의 아우 김창곤(69)씨는 “아들과 두 딸을 둔 형님께선 억울해서 바닷속에서 눈도 제대로 감지 못했을 것이다. 남편을 잃고 어린 조카 3명을 홀로 키우느라 형수님께서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고 안타까워했다.

모두의 기억 속에 묻혀 있던 해경 72정 사건은 2014년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차츰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2017년 세월호 선체가 인양되자, 72정의 탐색과 인양 필요성도 언급되기 시작했다. 2018년 11월 청와대 국정감사에서 ‘72정 탐색과 인양에 어떤 입장이냐’는 당시 자유한국당 이철규(동해·삼척), 이양수(속초·고성·양양) 의원 등의 질의에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은 “(탐색과 인양은) 국가의 책무라고 생각한다. 38년이란 시간이 지났다고 해도 가족들의 아픔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조병주 유가족협의회장은 “그동안 유가족들은 침몰한 72정을 찾아달라고, 인양해달라고 제대로 요구도 못 한 채 한평생을 가슴에 묻고 지냈다. 그러다 세월호 인양을 계기로 국가를 위해 일하다 순직한 72정 승조원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제기됐다”고 말했다.

속초해경이 2019년 4월 바닷속에서 72정을 찾았다. 사진은 영상탐사 장비를 통해 확인한 72정 모습. 한국해양과학기술원 제공

■ 39년 기다렸는데…수색 한달 만에 발견

국정감사에서 언급이 있은 뒤인 2019년 1월 해경은 전문가들로 꾸린 탐색기술자문회의를 개최하는 등 탐색 준비에 착수했다. 같은 해 3월4~27일 사이 72정이 침몰한 것으로 추정되는 곳을 중심으로 4.8㎞ 반경 해역에 해경 잠수지원함(1200t급)을 투입해 1차 탐색을 벌였다. 이어 28일부터는 한국해양과학기술원 해양조사선 이어도호(357t)가 투입돼 해경 잠수지원함이 파악한 40여개 의심 지점을 대상으로 2차 확인 작업을 벌였다. 결국 4월2일 72정으로 추정되는 선체를 발견했다고 공개했다.

침몰 추정 지점에서 북쪽으로 643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 수심 105m 바닷속에서 발견된 낡은 배는 온통 녹슬고 폐그물로 뒤덮여 있었다. 하지만 함미 부분의 둥근 형태를 띤 포 거치대와 하부 가림막, 엔진 덮개 등이 72정과 일치했다. 선체 크기(길이 24m, 너비 5m)도 72정과 같았다.

강택윤 부회장은 “72정과 승조원들은 침몰 장소에서 불과 600여m 떨어진 곳에서 39년 동안 구조의 손길을 기다린 셈이다. 선체를 발견했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와 ‘너무 늦어서 미안하다’며 한참을 울었다”고 말했다.

2019년 3월 사고 해상에서 열린 탐색 설명회와 헌화 행사에 참석한 유가족들이 순직자의 명단이 적힌 펼침막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 가족들 “조속히 인양”…예산이 장벽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유가족들은 빠른 유해 수습과 선체 인양을 기대했지만, 해경은 ‘예산 확보’ 등을 이유로 “기다려 달라”는 답변만 반복하고 있다.

해경은 72정을 발견하고 1년 넘게 흐른 뒤인 지난해 5월에야 한국해양대학교에 72정을 인양할 수 있는지, 또 비용은 얼마나 드는지 등 연구용역을 맡겼다. 연구용역비(1억9천만원) 예산 신청과 국회 통과 등에 1년 넘는 시간이 소요됐다는 게 해경 쪽 설명이다.

하지만 언제쯤 인양이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한국해양대학교는 인양 가능 여부 등을 판단하기 위한 현장조사에 40억원, 실제 인양에 최대 205억원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했다. 기획재정부는 2021년 예산안에서 인양 예산은 전액 삭감했고, 현장조사 예산 45억원만 반영해 국회에 넘겼다.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는 실종된 대원 17명의 유해 수습과 선체 인양을 위해 필요하다며 지난해 11월 예산 205억원을 증액 의결했지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와 본회의 의결 과정에서 다시 전액 삭감됐다.

해경 72정 모습. 유가족협의회 제공

유가족들은 정부가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순직자 유해 발굴까지 추진하면서 바다에 묻힌 순직자 찾기에는 허송세월만 하고 있다고 항의하고 있다.

조병주 유가족협의회장은 “72정 순직 대원들은 민간 선박도 아니고 해상 경비 중에 순직한 국가유공자다. 그 숫자가 얼마든, 비용이 얼마가 들든 간에 모두 인양해 가족 품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호소했다. 박광회 협의회 간사는 “전문 인양업체에선 72정은 작은 배라서 침몰 지점 해상에 크레인을 설치한 뒤 잠수부가 해저면에 내려가 선체 밑에 그물망 등을 설치하면 유해 유실 없이 충분히 인양할 수 있다고 한다. 더는 시간을 끌지 말고, 현장조사까지 전문 인양업체에 맡겨 하루빨리 72정을 인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제강용 동해지방해양경찰청 수색구조계장은 “사전에 인양 전문업체를 대상으로 견적 조사를 했는데 답변을 준 곳이 거의 없다. 인양 가능 여부 등 관련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선체와 유해를 안전하게 인양하기 위해서는 현장조사가 선행돼야 한다”며 “2021년 하반기 (2022년 예산안에) 현장조사 예산을 다시 신청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박수혁 기자 ps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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