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정인이가 살았더라도

윤수정 기자 2021. 1. 6.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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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이가 살았더라면 우리는 양심의 가책을 덜 수 있었을까. 양부모 학대로 사망한 생후 16개월 정인이의 장지로 ‘정인아 미안해’란 시민들의 추모가 이어진다는 소식에 바로 떠오른 질문이다. ‘그렇다’는 답이 나오질 않는다. 정인이 말고도 사건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5일 경기 양평군 서종면 하이패밀리 안데르센 공원묘원에 안치된 故 정인 양의 묘지에서 추모객들이 고인을 추모하고 있다./뉴시스

4년 전 광주 조선대병원 응급실에 다섯 살 지호(가명)가 오른팔이 부러진 채 실려왔다. 친모는 “아이가 자전거를 타다 다쳤다”고 했지만, 담당 의료진은 “학대가 의심된다”며 경찰에 신고했다. 수사는 수일 만에 중단됐다. 이유를 묻는 취재 질문에 경찰은 “지자체 위탁 아동보호전문기관이 ‘안전사고 같다’는 의견을 냈다”고 했다. 이 기관은 “어린이집 교사가 ‘학대 정황을 못 느꼈다’고 했다”며 다시 책임을 돌렸다. 한 달 뒤 지호는 다시 병원으로 실려갔고, 심하게 뭉개진 오른쪽 안구와 한쪽 고환을 제거해야 했다. 지호 친모의 동거남이 주먹과 찜질용 얼음주머니로 폭행을 일삼은 탓이었다.

지호 때와 달리 정인이는 담당 의사뿐 아니라 어린이집 교사, 양부모의 지인까지 학대가 의심된다며 목소리를 냈다. 그런데도 경찰은 정인이를 고통 속에 방치했다. 최근 감찰 과정에선 뒤늦게 “아동보호전문기관으로부터 정인이 정보를 제때 공유하지 못했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한다. 아동보호전문기관은 경찰과 관련 정보를 공유했다고 주장한다.

경찰과 아동보호전문기관의 엇박자를 피해 정인이가 살았더라도, 아이의 고통을 온전히 지워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학대 경험은 평생을 쫓아다닌다. 10대 시절 내내 부모에게 맞고 자란 어느 학대 경험자는 “30대가 되도록 취업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몸에서 악취가 난다는 트라우마에 시달리면서 시도 때도 없이 화장실로 달려가 몸을 씻는 버릇이 생겼기 때문이다. 생후 16개월 어린 정인이가 감당했어야 할 트라우마의 무게는 감히 상상조차 어렵다.

이런 상처를 관리하고 학대 가정으로부터 아이를 분리해 보호해야 할 아동보호 전담시설은 전국에 68곳뿐이다. 현행법상 본래는 각 시·도 및 시·군·구에 1곳 이상 설치됐어야 할 시설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 2017년 2만2367건이던 아동학대 사례 건수가 2019년엔 3만70건까지 늘었는데 같은 기간 피해 아동을 구제하기 위한 시설은 크게 늘지 않았다.

한 관계자는 “어쩔 수 없이 학대 부모의 심리치료 이수를 전제로 아동을 가정에 돌려보냈다가 재학대를 겪게 한 경우도 적지 않다”고 고백했다. 정인이의 죽음에 단순히 관련 책임자 처벌에 그치지 않고, 당국의 아동학대 재발 방지 노력의 부족을 따끔히 물어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정인이가 다시 살아온다 해도 또다시 ‘미안해’란 말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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