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미국의 그늘, 제론토크라시[글로벌 이슈/하정민]
그러나 정치 분야의 고령화는 심각한 수준이다. 3일 개원한 117대 의회에서 상원의 평균연령은 64세, 하원은 58세다. 1981년 시작한 97대 의회에서 이 수치는 각각 53세와 49세였다. 불과 40년 만에 의회가 10년 늙은 셈이다.
양당 지도부는 어떨까. 권력서열 3위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 미치 매코널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 등은 모조리 70, 80대다. 20일에는 미 역사상 최고령인 79세 대통령까지 취임한다. 노년층이 사회 전반을 장악해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는 정치체제를 뜻하는 ‘제론토크라시(gerontocracy)’란 용어가 최근 미 언론지상을 장식하는 이유다. 뉴리퍼블릭 같은 진보성향 매체는 아예 “미국이 노년 페티시에 빠졌다”는 신랄한 비평까지 내놨다.
제론토크라시가 미국만의 일은 아니다. 고령화와 평균수명 연장이 낳은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문제는 젊은 세대에게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전수하고 고령자 권익을 보호하며 노인 빈곤을 해결하는 일 같은 긍정적 의미의 ‘어르신 정치(senior politics)’가 사라지고 극소수 기득권 고령자의 의제만 과하게 대표되는 모습이 나타난다는 데 있다. 오래전 계층이동의 사다리에 올라타 ‘용’이 된 장노년층이 젊은 가재, 붕어, 개구리가 승천할 사다리를 치우는 데 직간접으로 일조하거나 방관하고 있다는 의미다.
미국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창궐하던 지난해 5월 퓨리서치센터 조사에 따르면 미국 내 Z세대(1997∼2012년 출생자)의 절반이 “코로나19로 실직하거나 급여가 줄었다”고 했다. 밀레니얼세대(1981∼1996년생)의 40%도 가세했다. 베이비붐세대(1946∼1964년생)의 25%와 대조적이다. 그런데도 이후 유명 장년 정치인 중 청년실업 대책을 내놓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2일 매코널 대표와 펠로시 의장의 자택에는 ‘내 돈 내놔라’ ‘2000달러’ 같은 낙서와 가짜 돼지 피가 등장했다. 상원 다수당인 공화당이 지난해 12월 29일 코로나19 현금지급액을 당초 양당이 합의한 600달러에서 2000달러로 늘리려는 시도를 저지하자 일부 시민이 양당 1인자의 집에 몰려간 탓이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각각 재산이 최대 2500만 달러, 5800만 달러로 추정되는 의회 내 대표적인 자산가다. 의회 입성 시기도 각각 1985년과 1987년으로 비슷하다. 정치인 집을 훼손한 일은 비판받아 마땅하나 미 사회 전반에 ‘당적에 관계없이 30, 40년간 중앙정계에서 호의호식한 당신들이 전대미문의 전염병으로 고통받는 서민의 심정을 어찌 알겠느냐’는 분노가 흐르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노인 중심의 권력구조는 그 특성상 세대 갈등 및 양극화 심화, 국가경쟁력 약화 등으로 이어질 때가 많다. 미국에서도 2019년 기준 밀레니얼세대 인구가 7212만 명으로 베이비부머(6956만 명)보다 약 260만 명 많지만 경제 권력은 여전히 베이비붐세대가 쥐고 있다. 현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500대 기업 최고경영자(CEO)의 평균연령은 58세로 2006년보다 14세 높아졌다. 20년 전 미 전체 노동인구의 15%를 차지했던 55세 이상 근로자의 비율도 30%로 증가했다.
서유럽 선진국 중 국가부채, 청년실업률 등이 가장 높은 이탈리아, 한때 미국과 함께 세계를 호령했던 옛 소련의 몰락 또한 각각 2000년대, 1980년대 연이어 고령 지도자가 집권한 여파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2015년 44세에 최고권력자에 오른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당시 남녀 동수 내각을 출범시킨 후 이유를 묻는 취재진에게 “지금은 2015년이니까”라고 일갈했다. 6년이 흐른 지금 세상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늙은 사회를 바꾸는 일보다 시급한 과제는 없다고 외친 트뤼도의 일성은 아직 유효하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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