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직필]피·땀·눈물이 아직도 답인가

주병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2021. 1. 6.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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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우리 세대의 부모들은 그렇게 살았다. 새벽부터 일어나 하루 종일 뼈 빠지게 일하고 밤늦게 귀가했다. 한여름 무더위 속에서도, 한겨울 엄동설한에도. 피, 땀, 눈물로 골병 들어도 자식의 미래가 희망이 됐다. 내 기억 속에 우리 부모들은 그렇게 살았다. 그런 부모들의 노력과 그 자식들의 노력이 쌓이고 쌓여 나라는 발전을 거듭했고 이제는 그때보다 수치로 보면 10배 가까이 잘사는 선진국이 됐다.

주병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그러나 아직도 수많은 부모들, 노동자들이 과거 우리 부모들처럼 피, 땀, 눈물을 흘린다. 절망의 늪에서 일어난 사건과 사고들은 끊이질 않는다. 고 김용균 노동자의 먼지 자욱한 작업장, 그의 가방 속 한 끼 식사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절망이다. 똑같은 일이 또 한 해 반복됐다. 지난해 4월 물류창고 건설현장 화재사건으로 사망한 38명의 노동자, 과로로 스러져 간 택배노동자들, 산재사고로 사망한 2000명에 가까운 노동가들이 살았던 나라는 10배 더 잘사는 나라가 아니었을 것이다. 아니 10배 더 가난했던 과거에 있던 희망조차 없는 더 불행한 나라에서 살았을 것이다.

피, 땀, 눈물 그리고 희망이 우리 경제가 10배 성장한 이유다. 그렇게 갈고닦은 재능과 기술이 초일류 기술 엔지니어와 지식 엘리트들을 탄생시켰고 이들의 노력이 지금 우리 경제를 이끄는 혁신적 기업들을 만들었다. 온 국민이 피, 땀, 눈물을 흘리며 나라의 근간을 지탱하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국민들이 자기 위치에서 만들어낸 공동의 성과였다. 이런 성공 신화가 지속될 수 있을까? 피, 땀, 눈물 그리고 ‘절망’인 현실을 안 바꾸면 지속될 수 없다. 상류층, 특권층만 과거보다 10배 더 잘살게 된 나라에서 신화는 없다. 극심한 양극화로 계층상승의 통로가 막힌 사회에서 희망은 없고 발전도 없다. 절망 속 피, 땀, 눈물은 죽음, 분노, 원한을 쌓고 나라는 쇠퇴한다. 민주주의와 국가의 역할, 자본주의의 민주적 통제가 중요한 이유다. 국민들에게 기회와 희망을 주기 위해 그렇고, 국가와 경제의 발전을 위해서도 그렇다.

서구 선진국들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공진화 속에서 발전했다. 19세기 자유방임자본주의가 초래한 독점, 불평등 그리고 양극화의 폐해가 자본주의의 민주적 통제를 강화시켰고 이런 변화는 다시 자본주의의 발전과 번영으로 이어졌다. 20세기 복지국가자본주의는 국가의 개입과 규제를 강화했고 정부의 규모를 키웠다. 그리고 그 부작용으로 시장이 위축되고 비효율은 커져 경제발전이 지체된다는 비판을 낳았다. 그렇게 등장한 신자유주의자본주의는 국가와 공공부문의 역할을 축소시키고 시장의 자율적 질서를 존중하는 개혁의 조류가 됐다. 효율성을 위해 규제완화, 민영화, 세계화가 가속화됐다. 신자유주의와 금융자본주의의 팽창은 다시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켰고 세계금융위기와 같은 자본주의의 내재적 불완전성을 들춰냈다. 그리고 이제 다시 불평등과 양극화의 민주적 통제가 경제발전과 인간진보의 조건이 되는 포용적 자본주의의 시대가 도래했다.

우리의 짧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민주주의와의 공진화는 생략됐다. 복지국가자본주의도 없이 신자유주의를 심었고 불공정한 시장의 자율적 질서와 경쟁만 강조했다. 그 결과는 19세기 자본주의의 폐해, 독점과 경제력 집중,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였다. 입법, 사법, 행정, 언론을 아우르는 권력과 재벌 경제력의 카르텔은 민주주의 발전을 막았고 자본주의에 대한 민주적 통제는 무력했다. 지금 우리가 산업재해 공화국, 부패한 국가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것, 소득과 교육을 통한 계층 상승이 어려운 기회불평등한 사회가 된 것은 이런 민주적 통제가 작동하지 못한 결과다.

기후위기와 코로나19라는 경제외적 요인이 야기한 심각한 경제충격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관계에 대한 새 화두를 던졌다. 국제사회, 국가, 기업 모두 환경, 사회, 지배구조를 통치와 경영의 중심에 둬야 할 새 민주적 자본주의로의 발전이란 길이 열린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에 대한 민주적 통제의 단계상승을 의미하고, 우리가 생략한 자본주의 역사를 개혁이란 다리로 넘어야 함을 의미한다. 산업재해, 권력부패, 세습재벌 공화국에서 벗어나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 공정한 시장경제를 확립할 개혁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양극화와 불평등 해소를 위한 정부 기능이 강화되고 교육, 건강, 사회보험과 금융을 통해 누구나 성공의 기회를 공평히 누리는 포용국가를 만들어야 한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개혁은 국민이 갈망할 때 이뤄진다. 반개혁 세력이 그 어떤 교묘한 술책으로 분탕질 쳐도 흔들리지 않는 정치참여가 그 갈망의 기술이다.

주병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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