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새해 아침, 전화번호를 지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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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야의 종소리가 없어도 새해는 왔다.
새해 아침,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딜리트(delete)'였다.
명함을 받으면 휴대폰에 전화번호를 관계의 성격별로 분류해 입력하고 메모난에는 만난 날짜와 장소, 만난 경위, 같이 만난 사람, 그 사람한테 들은 신상 정보를 메모해 놓는 버릇이 있었다.
전화번호로만 존재했던 관계의 유효기간은 이렇게 종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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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야의 종소리가 없어도 새해는 왔다. 집안에 우환이 있어 손수 끓인 떡국 앞에 혼자 앉았다. 막 휴대폰 문자가 울린다. 원단의 첫 손님은 올해도 변함이 없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하시는 일마다…"
20여통은 되는 거 같다. 그런데 막상 반가운 사람은 별로 없다. 그냥 얼굴 아는 정도의 지인이거나 정치인, 공직자가 대부분이다. 이 사람은 도대체 몇 명에게 단체 문자를 전송하는 수고를 했을까. 문자에 수신인 이름은 없다. '○○○ 배상'만 있다. 내 번호는 그의 수많은 연락처 중 그냥 원 오브 뎀이었을 뿐이다.
꼭 그래서 그런 건 아니었다. 불현듯 든 생각이다. 무언가 주변을 정리하고 한 해를 시작하고 싶은 충동이 밀려왔다. 새해 아침,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딜리트(delete)'였다.
반평생 기자를 한 나는 메모와 정리 강박이 있었다. 명함을 받으면 휴대폰에 전화번호를 관계의 성격별로 분류해 입력하고 메모난에는 만난 날짜와 장소, 만난 경위, 같이 만난 사람, 그 사람한테 들은 신상 정보를 메모해 놓는 버릇이 있었다.
내 폰에 저장된 번호들을 찬찬히 들여다 본다. 마치 내 삶의 궤적을 복기하듯 번호의 주인들을 기억에 소환해 본다. 이름과 얼굴은 생각이 나도 일 년에 단 한 번, 아니 수년에 한 번, 어쩌면 평생 동안 통화한 일이 없거나 없을 사람이 족히 절반 가까이는 되는 거 같다. 기억에서 사라진 사람도 적지 않다. 오랜 세월 잊은 채 지냈지만 이름을 보니 반갑고 그리운 이도 있다.
하지만 대범해지기로 했다. 서로에게 운명 같은 인연이라면 번호가 없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다시 만나겠지. 그동안 왜 그리 연락처를 정리하지 못했을까. 미래의 인연에 대한, 또는 언젠가 내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심리? 두터운 인맥의 과시욕? 내가 친하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전화를 했을 때 "누구세요"라고 물으면 섭섭했다. 번호 저장은 일종의 인맥 관리 노하우이기도 했다.
내가 살아온 한국 사회에서 인맥은 곧 스펙이었다. "우리가 남이가"를 참으로 많은 술자리에서 외쳤다. 휴대폰에 저장된 번호가 5,000명이 넘는 마당발이라는 평은 곧 그 사람의 인품이자 경쟁력을 말했다.
'던바의 수(Dunbar’s number)'라는 용어를 얼마 전에 알았다. 영국의 진화인류학자 로빈 던바 옥스퍼드대 교수가 인류학적 문헌을 통해 면밀하게 연구한 결과, 긴밀하고 진정한 친분 관계의 최대치와 인간의 인지 능력이 감당할 수 있는 교류의 한계는 150명 정도라는 것이다.
휴대폰에 저장된 가물가물한 이름들을 보니 다 부질없는 욕심이었고 한때의 치기였다. 내가 관심이 없던 것처럼 그들도 내게 관심이 없었던 거다. 관계 맺기에 대한 집착과 강박이었다. 안 입는 옷을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장에 넣고 꺼내기를 반복해온 것처럼.
한 명씩 번호를 딜리트한다. 번호가 남아 있다 해도 손해 볼 일도 아닌데 괜한 짓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이를 먹어 관태기(關怠期)가 온 건지도 모르겠다.
전화번호로만 존재했던 관계의 유효기간은 이렇게 종료됐다. 수십 년 인간관계가 처음으로 대규모 용도 폐기된 순간이다. 거사를 치르고 나니 휴대폰이 한결 가벼워졌다. 쓸쓸함이 순간 강물처럼 밀려왔지만 마음은 큰 짐을 던 것처럼 가벼워졌다.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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