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과실" "합의 참작"..96.7% 집유 낳은 '붕어빵 판결' [2020년 산안법 위반 1심 판결 전수조사 (하)]
[경향신문]
피해자 측과 합의했으니까
유족들 보험금 받아서 감형
2019년 705건 중 2건만 실형
대법원, 형량 강화 추진 불구
고의 책임 아닌 ‘과실’ 치부
‘산재=기업범죄’ 낮은 인식
‘중대재해법’으로 개선해야
2019년 9월 경남 양산시 한 공사현장에서 52세 노동자가 콘크리트 거푸집 작업 중 2.85m 아래로 떨어져 사망했다. 업체 대표는 안전벨트·작업발판 등 추락을 막기 위한 법적 조치를 하지 않은 혐의로 기소됐다. 지난해 9월 울산지방법원은 업체 대표에게 벌금 700만원을 선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판시했다. “추락사고 방지를 위한 기본적 안전조치를 이행하지 않아 근로자가 사망에 이르렀다. 하지만 건설현장에 만연한 안전불감증 및 공사비·공사기간 제약에 따른 구조적 문제도 사고 발생에 기여했고, 피해자 유족과 합의한 점 등을 참작했다.”
“엄벌주의가 능사는 아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에 대한 여러 비판 가운데 하나다. 그렇다면 ‘산재에 대한 엄벌주의를 택하고 있지 않은 현 상황’은 어떨까. 경향신문이 지난해 산재 사망 1심 판결문 178건을 전수조사한 결과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으로 법정에 선 피고인들은 대개 500만원 남짓의 벌금형을 받았고, 96.7%는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엄벌’이라고는 볼 수 없는 숫자이고, 일하다 죽는 사람들은 매일 꾸준히 발생하고 있다.
울산지법 판결문에는 산재에 대한 법원의 인식이 압축적으로 드러난다. 안전조치를 제대로 취하지 않은 피고인 잘못도 있지만, 현장 인부들의 ‘안전불감증’도 문제라며 피해자 과실도 탓했다. 그러면서 “유가족과 합의한 점을 참작한다”며 주문을 마무리하는 패턴은 178건의 판결문에서 수없이 되풀이된다. 해당 공사대금으로 8억6900만원을 받고 700만원을 벌금으로 낸 대표는 2006년 노동자 추락사로 처벌받은 전력도 있었다.
합의 여부가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도 아니다. 2019년 12월 충북 제천에서 노동자 1명이 거푸집에 깔려 죽은 사고의 경우 사업주는 유가족에게 용서받지 못했지만 공탁금 2000만원을 내고 선처받았다. 지난해 5월 의정부지법은 직원이 차량사고로 사망한 정비업체 사장에게 “유족과 합의하지는 못했지만 산재보험에서 유족급여가 지급됐다”며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피고인이 아니라 근로복지공단이 지급하는 산재보험금을 들며 “피해 회복이 이뤄졌다”고 판단한 사례는 이외에도 여러 판결문에서 확인된다. 산재보험은 의무 가입이기 때문에 모든 사업주는 형량 감경사유 하나씩은 갖고 재판에 임하는 셈이다.
재판부도 사정은 있다. 법관들이 형을 정할 때 참고하는 양형기준표를 보면, 산안법 위반 기본 형량은 6개월~1년6개월이다. 이를 4개월~10개월까지 깎아줄 수 있고, 가중하더라도 10개월~3년6개월에 불과하다. 경향신문이 임종성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대법원의 ‘산안법 위반사건 처리결과’를 보면, 2019년 1심 법원은 산안법 위반사건 705건 중 단 2건(0.28%)에만 집행유예 없는 실형을 선고했다. 지난해에는 이 비율이 1.49%(604건 중 9건)로 소폭 오르긴 했지만 여전히 미미하다. 산재 전문 법률사무소 ‘일과사람’의 손익찬 변호사는 “산안법은 사망 시 징역 7년까지 처할 수 있도록 규정했지만 이는 ‘법정형’일 뿐이고, ‘선고형’은 그보다 훨씬 낮게 설정돼 있다”며 “이 같은 양형이유를 모르는 유족들은 ‘어떻게 사람이 죽었는데 그럴 수 있느냐’며 낙담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법원이 안전조치 의무를 어긴 ‘고의범’을 ‘과실범’으로 본다는 지적은 꾸준히 제기돼왔다. 법원은 최근 들어서야 이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승원 서울남부지법 판사 등은 지난해 11월 대법원 양형위원회 심포지엄에서 이러한 판결 경향을 “‘고의도 아닌데 감옥에 보내는 것은 가혹하다’는, 단순한 법감정에 기초한 판단”이라며 “사업주 입장에서는 안전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드는 비용이 사고 후 합의·처벌 비용보다 적다면 계속해 안전조치를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산재 형량을 강화하는 기준안을 마련하고 있다. 하지만 기존 법의 양형을 올리는 것만으로는 법원·수사기관의 획기적인 인식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터에서의 사망을 ‘기업범죄’로 인식시키기 위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의 필요성이 거론된다. 손 변호사는 “산재를 ‘교통사고’ 정도로 보는 시각이 사회 전반에 깔려 있어 단순히 법원만의 문제는 아니다”라며 “입법을 통해 국민의 의사를 확인시켜주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회적 압력 없이 중대재해법 제정만 되면 현장엔 큰 변화 없을 것”
강태선 세명대 교수 인터뷰
“가족이 죽어 돌아오면 유족들은 경황이 없습니다. 회사의 회유·협박에 합의서를 써줘요. 대부분 법적 대응능력이 부족한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합의서가 수사서류에 붙어 검찰로 송치되고, 양형에도 반영됩니다. 수십년간 이런 구조였어요. ‘약간의 개선’만으로는 문제가 개선될 여지가 전혀 없다고 봅니다.”
강태선 세명대 안전보건공학과 교수는 5일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강 교수는 행정기관과 법원이 일터에서의 죽음을 어떻게 다루는지 가장 잘 아는 전문가 중 하나다. 2008년 40명이 사망한 경기 이천 냉동창고 화재참사 조사에 참여하기도 했던 그는 “사회적 압력 없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만 제정된다면 현장에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합의서→감형’, 수십년 구조…약간의 개선으로 해결 못해
중대재해법은 보수적인 법원·검찰 향한 ‘극약 처방’일 뿐
그는 중대재해법을 보수적인 법원과 수사기관의 관행을 깨기 위한 ‘극약 처방’이라고 표현했다. 중대재해법 도입으로 집행기관들의 업무분장에도 일대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까지는 산재가 발생하면 특별사법경찰관 자격을 가진 고용노동부 근로감독관들이 산업안전보건법에 의거해 조사·송치해왔다. 하지만 ‘처벌’을 목적으로 하는 중대재해법은 법무부, 특히 검찰의 적극적인 태도가 요구된다. 문제는 현재 검찰이 그럴 역량이 있느냐다. 강 교수는 “현재의 수사관행은 사고의 책임소재가 ‘아래로만, 현장으로만’ 쏠리는 한계가 있다”며 “검사들도 다른 사건이 많다 보니 노동청 조사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하고 사고의 내막을 깊이 들여다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중대재해법의 핵심은 노동자 사망의 책임을 더 높은 단위의 ‘윗선’까지 지우는 것이다. 강 교수는 “그걸 찾아내려면 기업의 회계장부를 뒤져야 한다. 예산 전결권 등을 파헤쳐야 하는 것”이라며 “전문적인 지식 없이는 책임소재를 밝혀내기 어려운 산업현장 사고의 특성상, 그 난도는 금융·증권 사건과 견줄 만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같은 기술적 전문성은 앞으로 반드시 만들어가야 하는 인프라”라고 덧붙였다.
<시리즈 끝>
김상범 기자 ksb123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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