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취] 물방울 그림에 반평생 바친 '한국 추상미술 거장'
1972년 처음 물방울 회화 선보여
“죽으면 나무 밑에 묻어달라”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한 방울의 물방울이고자 했다.
‘물방울 화가’ 김창열(92) 화백이 5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이날 유족 관계자는 “지난해 요양병원으로 거처를 옮겼으나 수개월 전부터 상태가 위중해졌다”고 했다. 반평생 물방울에 매달렸다. 생전의 그는 본지 인터뷰에서 “다른 건 그릴 줄 모르니까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물방울의 독창적 미감(美感)을 구축하며 세계적 거장으로 거듭났다. 2012년 은관문화훈장, 2017년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등을 받았다.
물방울 이전에 상처가 있었다. 1929년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나 16세에 월남했다. 서양화가 이쾌대가 운영하던 성북회화연구소에서 그림을 배웠고, 1948년 검정고시로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으나 6·25전쟁으로 학업을 멈췄다. 여동생을 잃었고 “중학교 동기 120명 중 60명이 죽었다”고 했다. 상흔이 화면을 채웠다. 죽은 육신과 총알의 흔적을 은유하는 암담한 색채의 캔버스가 당대의 증거로 남아있다. 1957년 현대미술가협회 창립 회원으로 활동하며 추상미술 앵포르멜 운동을 이끌었다. 참극 앞에서 목도한 좌절을 비정형의 회화로 풀었다.
물방울은 그 이후에 찾아왔다. 미국 뉴욕을 거쳐 프랑스에 정착한 1972년이었다. 파리 외곽의 외양간에서 숙식을 해결하던 때였다. “밤새도록 그린 그림이 마음에 안 들어 천을 떼 재활용하려는 요량으로 캔버스에 물을 뿌려놨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물이 방울져 햇살에 빛나고 있었다. 그 순간 존재의 충일감에 온몸을 떨었다.” 그해 파리에서 열린 ‘살롱 드 메’ 전시 출품작 ‘밤의 사건’을 통해 물방울 회화를 세상에 처음 선보였다. 물방울은 캄캄한 배경 속에서 푸른 광휘를 드러내고 있다.
물방울과 더불어 문자(文字)는 김창열 화업의 큰 축이다. “명필(名筆)로 비석 글씨 쓰시던 할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배웠다”고 했다. 그 기억에 기반해 글자를 쓰고, 위에 물방울을 얹은 ‘회귀’ 연작이 탄생했다. 물방울과 문자가 이미지와 언어, 동양과 서양, 추상과 구상의 세계를 연결한다. 그가 1976년 국내 처음 물방울 회화를 선보인 서울 갤러리현대에서 지난해 열린 물방울과 문자를 함께 조명한 전시가 마지막 개인전이 됐다. 4년 전 인터뷰에서 그는 “지금 현재에 만족한다”고 했다. “살 만큼 살았고, 손자도 봤고, 괜찮은 화가란 소리도 들었다.”
세계를 떠돌았으나 제주도는 각별하다. 전쟁 당시 경찰 신분으로 1년 6개월간 피란 생활을 한 곳이다. “추사 선생이 있었고 이중섭 화백을 여러 번 뵌 장소”라며 “프랑스에서 오래 살았지만 그때의 감동이 계속 영향을 미쳤다”고 회고했다. 2016년 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이 들어섰다. 짧은 축문을 남겼다. “나는 맹산이라는 심심산골에서 태어나 용케도 호랑이한테 잡아먹히지도 않고 여기 산천이 수려한 제주도까지 당도했습니다. 상어한테 잡아먹히지만 않으면 제주도에서 여생을 마무리하는 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장(葬)이 끝나면 그는 김창열미술관에 뿌리 내린 나무 밑에 몸을 뉘일 것이다. 물방울은 사라진 듯싶다가 어느 날 다시 지상에서 존재를 반짝인다. 빈소는 서울 고려대 안암병원, 발인 7일 11시 50분. (02)923-4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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