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청 건설노동자 죽어도, 직업병 걸려도 업주 처벌 어렵다

박준용 2021. 1. 5.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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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대재해기업처벌법]중대재해기업처벌법 여야 잠정합의 조항
재해조사의견서 391건 산재 사례 적용해보니
5일 국회 앞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촉구 농성장에 법 제정을 촉구하는 신발이 놓여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오는 8일 국회 본회의 상정을 앞두고 법안심사를 진행하고 있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중대재해법)안에서 여야 잠정합의에 다다른 조항들이 적지 않은 산업재해 처벌 사각지대를 낳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발주처 책임을 부여하지 않는 등의 조항은 건설노동자를, 중대재해 범위를 제한하는 조항은 직업병과 중상을 입은 노동자를 포괄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한겨레>는 5일 강은미 정의당 의원실이 고용노동부로부터 제출받은 지난해 1~9월의 재해조사의견서 391건과 노동계를 통해 취재한 산재 사례를 취합한 뒤 최근 여야가 잠정합의에 다다른 조항을 적용해 분석해봤다.

분석 결과, 우선 건설현장에서 임대계약으로 투입된 장비를 운용하는 노동자가 사망하거나 다치면, 논의되고 있는 중대재해법으로 원청을 처벌하기 어려워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애초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안과 강은미 정의당 의원안에는 사업주와 법인이 임대계약을 한 경우에도 원청에 안전보건의무를 묻는 조항이 담겨 있었는데, 여야는 법안심사소위에서 이를 삭제하자고 논의했다. 이견은 거의 없었다.

지난해 7월 경기도 양평의 한 공사현장에서 일용직 덤프트럭 운전기사 ㄱ씨가 작업 중 숨진 사례가 이에 해당한다. ㄱ씨는 트럭 후면에 흙을 터는 작업을 하다가, 현장의 굴착기가 트럭과 충돌해 트럭의 적재함과 후면 사이에 끼여 사망했다. 당시 ㄱ씨가 운전한 덤프트럭은 시공사 재하청업체와 임대계약 상태로 현장에 투입됐다. ㄱ씨 사례처럼 건설현장에서는 장비임대와 노무에서 이런 형태의 임대계약이 일상적이다. 이에 김용균 특별조사위원회 이행점검단은 지난 3일 국회에 의견서를 내어 “기계장비 임대차 계약에서 중대 사고가 다발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발주처-원청-하청-재하청 등 다단계 하도급 구조로 이뤄진 공사현장에서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발주처의 공기단축 요구로 인해 무리한 작업을 하다가 사고로 이어지는 경우에도 발주처의 책임을 묻기 어려워질 수 있다. 정부는 최근 발주처의 안전보건의무 부과 조항을 삭제하는 법안을 냈는데, 여야는 법안심사소위에서 이를 별달리 문제 삼지 않았다.

지난해 38명이 숨진 이천물류센터 화재 참사가 여기에 해당한다. 법원은 지난달 29일 발주처가 무리한 공기단축을 지시했고, 이로 인해 여러 사람이 동시에 작업하면서 안전조처가 부실했던 점이 사고에 영향을 미쳤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대로 중대재해법이 통과되면 발주처 경영책임자 등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정부 통계를 보면, 2014년부터 2018년 9월까지 공공기관 사고 사망자의 85.2%가 발주공사에서 발생했다. 이영록 전국건설노조 경기도건설지부 노동안전전문위원은 “중대재해법에서 발주처 책임을 빼는 것은 수주산업의 특성을 고려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직업병 산재에도 법 적용이 쉽지 않아 보인다. 법안심사소위는 중대재해법 직업병 기준을 ‘급성중독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직업성 질병자가 동일한 원인으로 5명 이상’으로 한정하는 조항에 잠정합의했다. 이 경우 지난해 포스코 노동자가 ‘직업성 암’으로 신청한 산재가 모두 승인되더라도, 중대재해법을 적용해 사업주 등을 처벌하기 어렵게 된다. 산재를 신청한 11명(사망 3명)의 발병 원인은 폐암 4명, 폐섬유증 2명, 루게릭병 3명, 방광암 1명, 혈액암 1명 등으로 나뉘어 있다. 금속노조 포항지부 포스코지회 한대정 지회장 직무대행은 “직업병은 발병한 시점과 질병이 다르고, 한 사업장에서 나오는 유해물질도 여러 가지”라며 “‘동일한 원인으로 5명 이상’ 기준을 적용할 수 있는 사례를 찾기 힘들어 보인다”고 지적했다.

‘6개월 이상 요양이 필요한 부상자가 동일한 사고로 2명 이상 발생한 재해’로 규정한 부상자 관련 잠정합의 조항도 문제 소지가 다분하다는 지적이다. 이 조항은 우선 ‘3개월 이상의 요양이 필요한 부상자가 동시에 2명 이상 발생한 재해’로 부상자 개념을 규정한 산업안전보건법보다 기준이 축소됐다. 게다가 이렇게 될 경우 같은 작업장에서 부상의 정도가 다른 산재가 발생한 작업현장은 처벌이 어렵게 된다. 지난해 5월 세종시 엘리베이터 설치 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자 2명이 6m 높이에서 추락한 산재가 이런 경우다. 회사는 현장에 작업 발판과 추락방호막을 설치하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부상 정도는 각각 3개월과 6개월이어서 회사에 중대재해법을 적용하기 어렵게 된다. 최민(직업환경의학 전문의)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는 “노동자가 크게 다치는 사고는 결국 사업주가 해야 할 의무를 지키지 않아서 발생한 것”이라며 “중대재해의 부상자 기준을 기존 산안법보다 좁힐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박준용 기자 juney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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