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 작가 김창열, '無의 세계'로 떠났다
50년간 물방울 그리며
인간의 불안·분노 정화해
50년 가까이 물방울에 천착한 한국 추상미술 거장 김창열 화백이 5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2세.
1972년부터 인간의 불안과 분노, 공포 등을 물방울에 융해시켜 투명하게 무(無)로 만들어온 그가 결국 고통 없는 '무의 세계'로 떠났다. 한국전쟁을 겪고 프랑스 파리에서 가난한 동양 작가의 설움을 딛고 성공했지만 돌이켜보면 고단한 삶이었다.
1929년 12월 24일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13세에 불심검문에 걸려 평양소년부에 반공주의자로 수감되기도 했다. 16세에 월남해 이쾌대가 운영하던 성북회화연구소에서 그림을 배웠다. 검정고시로 1948년 서울대 미대에 입학했으나 한국전쟁 발발로 학업을 중단했다. 1957년 작가들과 현대미술가협회를 결성해 창립회원으로 활동하며 한국의 앵포르멜(제2차 세계대전 후 뜨거운 추상화)미술 운동을 이끈다.
1961년 제2회 파리비엔날레에 참여했으며, 1965년부터 4년간 뉴욕에 머물며 록펠러재단 장학금으로 아트스튜던트리그에서 판화를 전공했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도움으로 1969년 제7회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가했고, 이후 파리에 정착한다.
그의 대표작인 물방울 회화는 1972년 파리 인근 팔레조 마구간에서 탄생했다. 유화 색채를 떼어내 재활용하려고 캔버스에 물을 뿌렸는데 아침 햇살에 빛나는 물방울을 발견했다. 고인은 생전에 매일경제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밥 해먹을 쌀이 없을 정도로 가난했던 신혼이었죠. 마구간에 화장실도 없어 옆집에서 물을 길어다 캔버스에 뿌렸어요. 뒷면 솜털에 물방울이 일정하게 맺힌 게 아니라 컸다, 작았다, 그게 아주 찬란하다 생각했어. 이게 그림이 되겠구나."
1972년 파리 살롱전 '살롱 드 메'에 처음 선보인 영롱한 물방울 회화는 그의 인생을 바꿨다. 서양 유화 기법에 소멸 직전의 아름다움을 담은 동양적 화풍으로 호평을 얻었으며 지금은 수억 원대에 팔린다. 2004년에는 프랑스 국립 죄드폼미술관에서 그의 화업을 조명하는 초대전을 열어 세계 미술계에서 위상을 높였다. 2013년에는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을, 2017년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오피시에'를 수상했다. 2013년에는 대표작 220점을 제주도에 기증했으며, 2016년 제주도에 김창열미술관이 개관했다. 생전에 고인은 이 미술관 나무에 수목장을 원했다고 한다.
세상을 투영하는 듯한 오묘한 물방울 그림은 프랑스 퐁피두센터, 일본 도쿄국립미술관, 미국 보스톤현대 미술관, 독일 보훔미술관 및 국립현대미술관 등 전 세계 주요 미술 기관에 소장돼 있다. 국립현대미술관(1993), 드라기낭미술관(1997), 쥬드폼므미술관(2004), 중국국가박물관(2005) 등 세계 주요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60여회 펼친 개인전의 마침표는 지난해 10~11월 갤러리현대 전시 'The Path(더 패스)'였다. 당시 건강이 악화돼 요양병원에 입원중이었다.
사람 좋아하고 거절을 잘 못해 파리 자택에 찾아온 손님들에게 직접 구운 양고기를 대접했던 그의 별세 소식에 미술계 애도가 이어지고 있다. 고인과 절친했던 단색화 거장 박서보는 "우리나라 미술계 큰 거목을 하나 잃었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 깊은 슬픔을 표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마르틴 질롱 씨와 아들 김시몽 고려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김오안 사진작가 등이 있다. 빈소는 고려대 안암병원 301호, 발인 7일 오전.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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