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클럽] 福을 아낄 것

곽아람 기자 2021. 1. 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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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주 시작들 잘 하셨습니까?

Books는 과학저널리스트 강양구, 글 쓰는 트레이더 김동조, 소설가 김숨, 동화작가 백희나, 소설가 정세랑, 미학자이자 논객 진중권 등 2020년 ‘올해의 저자’ 여섯 명과 박소령 퍼블리 대표, 우석훈 성결대 교수, 소설가 장강명, 뇌과학자 장동선 북칼럼 필진 네 명으로부터 ’2021년에 권하는 책' 한 권씩을 추천받았습니다.

전업주부의 눈으로 본 ‘자본론’ 등 사회과학 고전에 대한 에세이부터 조셉 콘래드의 고전 ‘암흑의 핵심’, 새해엔 달리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을 위한 마음가짐 가이드, 완고한 법복에 가려진 판사의 따스한 심장이 드러나는 에세이, 코로나 이후 사람들이 부쩍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사는 ‘공간’에 대한 그림책, 그리고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는 팬데믹 입문서까지 다채로운 책들이 목록에 올랐죠. 고른 책의 면면에서, 추천하는 글의 문장과 단어에서 필자들의 성정과 스타일을 짚어볼 수 있습니다.

공감·용기·배려·반성… 10권의 책, 10개의 美德

정채봉 산문집 '첫 마음'

“1월 1일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면서 먹은 첫 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언제든지 늘 새 마음이기 때문에 바다로 향하는 냇물처럼 날마다 새로우며, 깊어지며, 넓어진다.”

동화작가 정채봉(1946~2001) 산문집 ‘첫 마음’(샘터) 앞머리에 적힌 문장입니다. 9일이 20주기인 정채봉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글 마흔 편을 엮어 새로 나온 책인데요. 정채봉 시 ‘첫 마음’ 중 한 구절을 뽑아 발문(跋文)으로 삼았답니다.

창비아동문고에서 출판된 정채봉 동화 '오세암'

정채봉 작품은 초등학교 때 창비아동문고의 ‘오세암’으로 처음 접했습니다. 고아라 절에 맡겨진 소년 길손이가 폭설로 한 달 넘게 산 속 암자에 혼자 고립되었는데, 탱화 속 관음보살을 어린아이의 티맑은 마음으로 “엄마”라 부르다 보니 부처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애틋하고 아름다운 동화. 영화와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져 유명한 작품이죠.

인물정보 데이터베이스에 ‘정채봉’을 검색하니 좌우명 란에 ‘복(福)을 아낄 것’이라 적혀 있습니다. 출판 편집자의 세계를 그린 일본 만화 ‘중쇄를 찍자!’가 떠오릅니다. 만화에 나오는 출판사 사장은 거액의 복권에 당첨되지만, 책이 팔리는데 쓰일 운이 다할까봐 복권을 염소에게 먹여버리죠.

중쇄를 찍자

그는 젊은 시절 노름에 빠져 방탕하게 지냈는데 동네 노인에게 강도짓 하려다 “나를 죽이면 네 운은 끝이다”라며 이런 말을 듣습니다. “ 운은 모을 수가 있다. 운이란 거는, 좋은 일 하면 모이고 나쁜 짓 하면 금세 줄어든다. 사람이라도 죽이면 끝장이야. 노름 좀 하지? 그럼 알 거 아니가. 평생 이기기만 하는 노름은 없다. 있으면 사기지. 세상은 말이다. 더하고 빼면 남는게 없는 법이다.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재. 갖고 태어난 거는 차이가 있어도, 패를 몇 장 받는지는 다 똑같아. 운이 네 편을 들어주면 복은 수십 배로 부풀어 오르는 게 된다. 문제는 ‘어디서 이기고 싶은가?’ 그거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한 번 생각해 보라. 생각하고 생각하고 토악질이 나올 정도로 생각해서, 선택해라. 운을 잘 써야 해.”

마음이 움직여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간 그는 갖은 일을 전전하다 출판사에 취직합니다. 그 출판사서 펴낸 미야자와 겐지 시집을 친구로부터 선물받아 읽었는데 ‘그저 글씨가 늘어서 있을 뿐인데’ 울음이 터졌기 때문이죠. 이후에도 노름을 했지만 큰 화재로 가족을 잃을 뻔한 날 판권을 산 무명 작가 작품이 대히트를 치자 노인의 말을 되새기며 술, 담배, 도박을 모두 끊고 ‘첫 마음’을 먹습니다. 일에서 이기고 싶다, 모든 운을 히트작에 쏟아붓고 싶다, 나를 사람으로 만들어 준 책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공헌하고 싶다고.

출판 편집자의 세계를 그린 일본 만화 '중쇄를 찍자'

모두에게 가혹했던 2020년이 지나갔습니다. 지난해엔 복을 좀 아낀 셈 치자고 올해 ‘첫 마음’을 먹어보았습니다.

정채봉은 ‘마음의 문을 열고’라는 글에서 이렇게 적었네요. “‘하늘이 내린 복을 다 받지 마라'는 말이 있다. 새 세기를 맞는 과학인과 기술인은 누가 먼저 내놓느냐는 경쟁에서 한 걸음씩 물러나 처음의 마음, 곧 인간을 위한, 인류의 미래를 위한 의의와 윤리를 다시 챙겨야 할 것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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