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서 잘리고..모은 돈 없고.. 불황에 무너지는 취약계층

이희진 2021. 1. 5. 06:04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최저생계비도 못 버는 계층 급증.. 정부 지원 끝나면 '줄파산'
빚 감당 못하고 결국 파산 신청
2020년 4만5000여건.. 전년比 9% ↑
“하루에도 12번씩 독촉 전화가 오니까 너무 스트레스를 받는 거예요. ‘죽으면 끝날까, 범죄라도 저질러서 감옥을 갈까’ 나쁜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도 개인파산은 안 하려고 버텨왔는데 이젠 한계네요.”

지난해 말 서울회생법원 앞에서 만난 김모(46)씨는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도 여러 번 한숨을 내쉬었다. 김씨는 지난해 6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경기가 악화하자 다니던 회사로부터 권고사직을 당했다. 월 170만원 남짓한 실업급여로 이 악물며 하루하루를 버텼지만 200만원가량 되는 대출 이자를 매달 내기엔 힘에 부쳤다. 30대 중반에 친한 고등학교 동창에게 사기를 당하면서부터 쌓이기 시작한 빚들이 어느덧 8000만원. 신용카드도 끊기고 월세도 내기 버거워진 김씨에게 남은 선택지는 개인파산뿐이다. 그는 “사기를 당한 것도 결국은 다 제 잘못이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너무 허무하다. 잠 들고 나면 영영 안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매일 한다”며 “이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개를 떨궜다.

개인파산 등으로 제도권 금융회사에서 돈을 빌리기 어려운 취약계층에게 소액대출을 해주는 사단법인 ‘더불어사는사람들’을 찾는 사람도 늘었다. 더불어사는사람들은 소액조차 빌릴 곳이 없어 절박한 이들에게 수십만원을 무이자로 빌려주는 단체다. 이 단체 이창호 대표는 “코로나19가 계속되면서 법인을 찾는 분들이 많이 늘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더불어사는사람들에서 취약계층에게 빌려준 금액은 3억1000만원으로, 2019년(2억5000만원)보다 24% 증가했다.

코로나19가 장기화하면서 취약계층이 먼저 쓰러지고 있다. 근로계약서조차 없이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다 보니 정규직보다 쉽게 해고당하고, 모아놓은 돈이 없으니 경기불황을 버텨낼 힘이 없다.

사선으로 내몰린 취약계층의 증가는 지난해 9%에 달한 개인파산 증가세에서도 확인된다. 개인파산은 개인회생과 달리 정기적인 수입이 없어도 신청이 가능하다. 꾸준한 수입이 없는 개인이 그만큼 늘어났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개인파산 증가세가 경기불황의 가늠자라며 올해는 개인파산이 더욱 늘어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지난해 정부가 시행한 대출 만기연장 등 지원이 끝나면 감춰져 있던 부실이 수면 위로 올라올 것이란 이유에서다.

눈물의 폐업 인사 오는 20일로 국내 코로나19 첫 확진자가 발생한 지 1년을 앞둔 가운데 서울 중구 한 식당 입구에 폐업을 알리는 안내문이 부착되어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개인회생은 감소했는데… 개인파산은 늘었다
4일 법원 통계월보에 따르면 코로나 사태 직격탄을 맞은 지난해 11월까지 접수된 개인파산은 4만5631건으로 전년 동기(4만1717건) 대비 3914건(9%) 증가했다. 2007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꾸준히 감소하던 개인파산 건수는 2019년(4만5642건) 증가로 돌아섰다. 12월 접수분을 더한 지난해 전체 개인파산 건수는 2019년 수치를 훌쩍 뛰어넘을 것으로 보인다. 2년 연속 증가세다.
개인파산은 늘었지만 개인회생은 2019년보다 줄었다. 지난해 11월까지 접수된 개인회생은 7만9235건으로 전년 동기(8만5381건)보다 7%(6146건) 감소했다.
개인회생이 줄어들고 개인파산이 증가한 가장 큰 이유로는 국내 경기악화가 꼽힌다. 개인회생은 월급, 연금소득 등 정기적 수입이 있고 해당 수입이 최저생계비(1인 가구 기준 약 105만원)보다 많아야 신청할 수 있다. 반면 개인파산은 수입이 최저생계비에 못 미쳐도 신청할 수 있다.
그만큼 최저생계비조차 벌지 못하는 취약계층이 늘어났다는 얘기다. 김태기 단국대 교수(경제학)는 “개인파산이 늘어났다는 건 쉽게 말하면 개인회생을 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이라며 “개인 삶의 질이 안 좋아졌다는 의미로 개인파산 신청 증가는 경기가 불황상태라는 걸 나타내주는 척도”라고 말했다.
개인파산 신청 절차를 간소화하고 개인파산이 적합한 채무자에게 이를 안내하도록 실무준칙을 개정한 것도 개인파산 증가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1월 법원행정처는 개인파산 및 면책 신청사건에 관한 예규를 개정하며 개인파산 신청 시 제출해야 하는 서류를 기존 40여개에서 14개로 대폭 줄였다.

지난해 11월엔 개인파산을 진행해야 하는 채무자가 개인회생을 신청한 경우 개인파산을 신청할 수 있도록 권유하는 방식으로 실무준칙도 개정했다. 회생위원이 개인파산 절차로 전환이 필요해 보인다고 보고서를 작성하면 판사가 판단해 ‘개인회생 신청을 취하하고 개인파산을 신청하라’는 보정명령을 채무자에게 송달하는 식이다.

서울회생법원 관계자는 “개인파산이 늘어난 첫 번째 이유는 당연히 코로나19”라면서 “개인파산 신청 절차를 간소화하는 등 제도적으로 개인파산 문턱을 낮춘 것도 개인파산 증가에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설명했다.

◆가려진 위험… 올해 개인파산 더 늘 듯

지난해에도 개인파산이 늘어났지만 더 큰 문제는 올해부터다. 정부가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채무자에게 시행 중인 대출 만기연장이나 이자 상환유예 등의 조치가 오는 3월 말 끝난다. 대출 만기를 연장해주고 이자 상환을 유예하면 당장의 부실을 가릴 수는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경기가 나아지지 않는 한 부실 채권이라는 폭탄을 미래로 미룬 것에 불과하다. 정부 지원이 끝나면 개인파산이 급격히 증가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이유다.
정부는 대출 만기 연장·이자상환 유예 조치를 오는 3월 이후 재연장하길 원하나 시중 은행이 난색을 표하고 있다. 특히 이자 상환유예 연장에 동의할 수 없다고 금융당국에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이자 상환을 계속 미뤄주면 부실 규모를 파악하기 어려워 은행의 위험 부담이 가중된다는 이유에서다. 지난해 12월 기준 금융권이 만기연장해준 대출과 보증은 149조6000억원으로 150조원에 육박한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말 공개한 ‘하반기 금융안정보고서’에서 원리금 상환 유예 조치가 연장되지 않을 경우 적자 자영업자 가구 비중이 20.3%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유예 조치가 연장될 경우(16.6%)보다 3.7%포인트 높은 수치다. 이 수치는 자영업자의 매출이 회복되는 낙관적 시나리오를 전제로 한 것이라,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가 시행 중인 현재 전망은 더 암울하다.

김태기 교수는 “올해 (개인들의) 부실이 가시화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졌다. 정부가 일시적으로 정책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만 이는 ‘언 발에 오줌 누기’에 불과하다”며 “다가올 시한폭탄의 시간만 임시방편으로 늦추는 꼴”이라고 꼬집었다.

사진=뉴시스
◆3대 빚 탕감 제도 뭐가 다른가

빚을 더 이상 갚기 힘들 때 채무자는 개인회생과 개인파산, 채무조정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셋 다 ‘빚을 탕감해준다’는 점에서 기본 취지는 같지만 세부적으로 차이가 있다. 감당할 수 없는 빚더미에 억눌린 사람들은 자신에게 맞는 채무 탕감 제도를 활용해야 하지만 뭐가 뭔지 몰라 선택하기 곤란할 때가 많다. 개인회생, 개인파산, 채무조정의 정의와 특징을 질의응답 형식으로 소개한다.

―개인회생은 뭔가?

“개인회생은 최저생계비 이상의 정기적인 수입이 있어야 가능하다. 최저생계비는 1인 가구 기준 107만원이다. 정기적인 소득은 있지만 그 소득으로 빚을 갚아나가기 힘든 사람에게 알맞은 제도다. 변제기간은 원칙적으로 3년이며 변제기간이 지난 뒤 남은 채무는 면책된다. 빚은 무담보의 경우 5억원, 담보의 경우 10억원 이하일 때만 개인회생 절차를 진행할 수 있다.”

―개인파산은 뭐가 다른가?

“최저생계비도 벌지 못하는 사람은 개인파산을 신청해야 한다. 개인파산을 신청한 채무자는 파산 선고 당시 갖고 있던 재산으로 채무를 변제하고 나머지는 모두 면책받는다. 개인파산은 면책결정이 나야 끝인데, 면책결정까지 빠르면 1년, 보통 2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개인파산 과정에서 불이익은?

“개인파산은 면책 결정을 받을 때까진 어느 정도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공무원, 사립학교 교원 등 일부 직업을 가질 수 없다. 반면, 개인회생은 공무원을 할 수 있고 체크카드 사용과 은행계좌 개설도 가능하다.”

―채무조정은 뭔가?

“빚이 많은 채무자들에게 상환기간 연장과 분할상환, 채무감면 등의 방식으로 채무자들의 재기를 지원해주는 제도다. 법원의 개인회생과 비슷하지만 제도를 시행하는 주체가 법원이 아닌 신용회복위원회다. 채무조정과 개인회생의 가장 큰 차이는 사인 간 채권의 정리 여부다. 신용회복위는 금융회사와 협약을 맺고 채무를 조정해주는 사적 채무조정제도라 사인 간 채권을 정리해주진 않는다. 이에 비해 개인회생이나 개인파산은 개인에 대한 모든 채무도 정리해준다.”

―어떨 때 개인회생 대신 채무조정을 이용하면 좋나?

“일용직 근로자나 노점상을 운영하는 채무자라면 개인회생보다 채무조정이 용이할 수 있다. 개인회생을 하려면 자신이 정기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소득이 있다는 걸 증명해야 하는데 일용직 근로자나 노점상은 소득 증빙이 쉽지 않다. 신용회복위는 일용직 근로자 등이 일당을 받는 계좌를 보여준다거나 하면 이를 정기적 소득으로 인정해주기 때문에 해당 채무자들은 개인회생 대신 채무조정을 신청하는 게 좋다.”

이희진 기자 heejin@segye.com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