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석유 부국 베네수엘라의 脫석유
석유 산업 정책의 이념화
최대 매장국을 석유빈국으로
한국 脫원전과 다르지 않아
베네수엘라 주유소의 휘발유 가격은 리터당 2000볼리바르(0.02달러)다. 차에 50리터 가득 넣으면 1달러, 우리 돈 1100원 약간 안 된다. 정부가 보조해 줘서 가능한 세계 최저가다. 하지만 주유소에 기름 없는 날이 너무 잦은 게 문제다. 돈 있는 사람들이야 리터당 0.5달러씩 현찰을 주고 정부 보조가 없는 사설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는다지만, 달러 현찰을 가지고 있을 리 없는 대다수는 정부 기름을 넣으려 주유소 앞에서 몇 ㎞ 장사진을 쳐야 한다. 기름을 못 구한 날, 세계 최대 석유 매장량을 보유한 나라에서 국민들은 장작을 때 밥을 짓는다.
이 어이없는 상황은 전임 대통령 우고 차베스가 1999년 집권한 뒤 본격적으로 석유 산업을 국유화한 결과다. 그는 ‘자원 주권을 민중에게’를 공약으로 내걸고 정권을 잡았고 그 공약을 실천했다. 하루 300만배럴 이상 뽑아낸 원유 중 60만배럴을 내수용으로 돌려 거의 공짜로 풀었다. 우방 쿠바에 많을 땐 하루 16만배럴씩 헐값에 보냈다. 2005년부터 8년 동안 미국 빈민층 15만가구에 난방유를 무상 공급했다. 사회주의 쿠바 민중도 자본주의 미국 민중도 베네수엘라 민중 정권의 혜택을 보고 있다는 일종의 쇼였다.
전문가들의 반대 의견은 철저히 무시됐다. 정권은 국영 석유회사인 PDVSA 고위직에 낙하산을 투하했고, 외국 파트너 기업들을 쫓아냈다. 이에 반발하는 엘리트 엔지니어 2300여명을 외국 기업의 하수인으로 몰아 2002년 한꺼번에 해고했다. 대신 자회사와 용역 회사 직원들을 PDVSA 정직원으로 편입해 정권의 우군(友軍)으로 삼았다. PDVSA 직원 수는 차베스 이전의 6배인 10만명이 됐다.
덩치는 커졌지만 회사는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PDVSA는 석유 사업 수익금으로 우유나 야채 같은 생필품을 서민에게 싼값에 공급하는 10여개 자회사와 수퍼마켓 체인을 만들어 운영하라는 정권 명령에 복종했다. 본업은 망가졌다. 베네수엘라 원유의 상당량은 불순물이 많은 초중질유다. 다른 나라보다 첨단 정유 시설을 갖추고 유지하는 것이 더 필수적인데, 회사는 석유 산업에 대한 투자를 거의 하지 않았다. 정권이 회사를 접수한 후 기술자들의 씨를 말렸으니 정해진 수순이다.
사회주의 정권 이전 베네수엘라의 하루 원유 생산량은 348만배럴로 세계 6위였지만, 최근엔 20만배럴 선으로 추락했다. 베네수엘라가 석유 수출로 요즘 벌어들이는 돈은 경제 위기에 못 견뎌 베네수엘라를 탈출한 난민들이 고국의 가족들에게 송금하는 달러보다 적다. 베네수엘라에선 새로운 석유 시추공을 찾아볼 수 없어 조만간 석유 생산량이 ‘0’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세계 제일의 석유 부국이 ‘탈(脫)석유’ 하는 데 20년 정도 걸린 셈이다.
사고 걱정 없는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대선 공약만으로 시작된 한국의 탈원전은 베네수엘라의 탈석유와 닮았다. 정책이라는 외피를 뒤집어 썼지만 결국 지지층 결속을 위한 이념이 산업을 재앙으로 몰고 있다는 점, 그 과정에서 전문가나 엔지니어 의견은 철저히 배제당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다만 베네수엘라는 석유 산업이 망가져도 땅속에 있는 석유는 건질 수 있을 텐데, 한국의 원전 산업 생태계는 한번 망가지면 복구하기 쉽지 않아 더 악성이다.
1년 전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에서 만난 한 현지인 사업가는 “좌파 정권이 달러(dollar paper)에서 화장실 휴지(toilet paper)까지 모든 걸 쥐고 통제하려 하니 제대로 돌아갈 리 없다. 능력이 없으면 그냥 놔둬야 한다”고 했다. 한국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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