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작은 거짓말의 시대
[경향신문]
1999년, 노인 보건정책에 경종을 울릴 만한 연구가 발표되었다. 손주의 기말고사를 앞두고 할머니의 사망률이 급증한다는 것이다. 코네티컷 주립대 생물학과 마이크 애덤스는 학생 100명당 가족 사망률이 평소에는 0.054에 불과하지만, 중간고사 무렵 0.574로 치솟고 기말고사 직전에는 1.042로 증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무려 20배에 가깝다. 게다가 이런 추세는 점점 악화되고 있다. 약 30년간 평균 가족 사망률이 다섯 배 넘게 증가했다.
아니 도대체 원인이 무엇일까? 애덤스는 손주를 걱정하는 할머니의 불안이 급사를 유발한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고아에게만 대학 입학 자격을 주거나 혹은 대학 입학 사실을 가족에게 비밀로 하는 등의 대책을 제안했다.
한국도 그럴까? 국내 연구는 아직 없다. 그러나 내 경험에 의하면, 사망보다 와병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정도는 아니지만, 많이 아프시다. 학생 자신의 건강도 크게 악화된다. ‘간병을 위해서’ 혹은 ‘스스로 아파서’ 과제를 연기해달라는 요청은 학기 말에 집중된다.
진지하게 읽었다면 미안하다. 농담처럼 쓴 논문이다. 물론 ‘거짓이 아니라 실제 데이터’에 근거한 논문이다.
거짓말은 인간의 본성이다. 언어 자체가 어느 정도는 거짓말을 위해 진화한 형질이다. 우리는 자기기만과 합리화를 통해 거짓말을 정당화한다. 특히 힘겨운 상황에서 더 쉽게 거짓말을 한다. 사실 정직은 값비싼 가치다. 굶주린 자는 좀처럼 손에 넣기 어렵다. 종신 재직권을 얻은 교수로선 걸핏하면 조모상을 들먹이는 학생이 괘씸할 것이다. 그러나 낙제 위기에 몰린 학생에겐 절박한 일이다. 고생하는 부모님께 또 등록금을 달랄 수 없다. ‘나중에 여건이 나아지면 훌륭한 사람이 되어 거짓말을 보상’하겠다고 자신을 속인다. 그렇게 커닝 페이퍼를 만들고, 남의 논문을 베낀다. 급기야 몇 년 전 돌아가신 할머니가 또 돌아가신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부인할 수 없는 어두운 인간성이다.
“거짓이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계급사회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거짓말을 상속받는다.”
장 폴 사르트르는 희곡 <더러운 손>에서 이렇게 말했다. 보통 사람의 거짓말은 가족과 나라를 팔아먹기 위해 저지르는 극악한 행동이 아니다. 일상의 작은 거짓말이다. 탕비실에서 커피 믹스를 두 개 꺼내서 하나는 주머니에 넣는다. 툭하면 무급 야근을 시키지만, 이익을 내도 월급은 그대로인 회사다. 큰 거짓말에 맞서는 작은 거짓말이라는 식이다. ‘기울어진 균형’을 조금 바로잡는 것이라고 합리화한다. 호부호형도 못하는 세상이니, 홍길동에게 범죄단체조직죄를 물을 수 없다는 논리다.
흥미롭게도 우리는 다른 이를 위해 거짓말할 때, 더 능숙하다. 두 시간씩 출퇴근에 허비하는 동료를 위해, 30분 지각을 정상 출근으로 기록해준다. 남을 돕는다는 좋은 의도가 거짓말이라는 죄책감을 희석한다. 진짜 ‘유능한’ 사기꾼은 이런 선의를 이용해 동료에게 ‘자발적 거짓말’을 시킨다.
그러나 거짓말은 어디까지나 거짓말이다. 불륜도, 부정부패도, 매국도 작은 거짓말에서 시작한다. 만약 ‘적당한 작은 거짓말’이 통용된다면, 금세 거짓말의 균형점이 이동한다. 거짓말 경주에 가속도가 붙는다. 시험 때마다 대학생 가족은 집단 사망할 것이다. 탕비실 커피는 박스째 사라질 것이고, 곧 사무실 책상도 뜯어갈 것이다. 머지않아 출근 없이 월급만 받는 유령직원이 생길 것이다. 모두 거짓말을 하는 세상은 모두에게 손해다.
지난 100여년, 참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살았다. 먹고살려고 어쩔 수 없이 거짓말도 했다. 작은 거짓말로 큰 악덕에 맞서기도 했다. 우리 할머니가 살았던 시대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아직 살아계신 할머니를 위해서라도, 잃어버린 진실의 균형을 되찾아야 한다.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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