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무화과 샐러드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집 마당엔 무화과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어느 날 오빠가 어디서 주웠는지 막대기 같은 걸 가져다가 마당 한쪽에 꽂아 둔 것뿐인데, 그게 쑥쑥 잘도 자랐다. 붉은 보랏빛으로 소담스레 익어가는 열매를 보면 ‘녀석, 햇살 참 잘 먹었구나’ 싶다가도 가까이서 보니 전혀 아름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잎이나 줄기에선 하얀 진액 같은 것이 흘러나와 손에라도 묻으면 기분 나쁘게 끈적였다. 약 냄새 같은 것도 나서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커다란 열매가 꽃봉오리인 줄 알고 언제 꽃피우나 마냥 쳐다보다 실망하기도 했다. 꽃이 없는 과실이라는 무화과(無花果)란 이름과 달리 꽃이 열매처럼 보이는 꽃 주머니 안에서 피는 것이고, 그 열매를 먹을 수 있다는 것조차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랬던 나는 ‘텔로미어’ 식단 연구자로 약이 되는 음식을 연구한다. 염색체 끝단에 있는 텔로미어는 수명과 관련된 역할을 하는데, 여기에 좋은 식단을 찾아 장수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다. 좋은 식재료에 대한 공부를 계속하다 보니, 어린 시절 그냥 스쳐 지났던 식재료를 귀한 손님처럼 맞는 경우가 많다. 요즘은 가까이하면 뭐라도 묻을 거 같아 왠지 멀리했던 그 무화과가 우리 집 식탁에 자주 오른다. 채소, 과일, 통곡물 등을 주로 내세우는 지중해식 식단이 최고의 건강식 중 하나로 꼽히면서 올리브 오일을 듬뿍 뿌린 샐러드는 식탁에 필수가 됐다. 아무리 멋 부려도 비슷비슷해 보이는 채소 과일 샐러드에 무화과만 올려놓으면 근사해진다. 초록빛 채소와 대비되는 진홍색 무화과 속살은 싱그러우면서도 탐스럽다. 화려한 꽃을 품은 만큼 영양소도 상당하다. 섬유질이 풍부하고 마그네슘, 망간, 칼슘, 구리 등 여러 필수 미네랄을 함유하고 있다. 혈압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되는 칼륨도 있고, 항산화 효과가 있는 폴리페놀 성분도 들어 있다. 무화과를 마주하면 겉으로는 덤덤해 보이지만 속이 꽉 찬 사람을 보는 듯하다. 최고의 식단을 완성하는 무화과가 어릴 적에 내가 눈길도 주지 않던 바로 그 무화과였나, 생경하기까지 하다.
건강 식단에 오르는 식재료를 살펴보면 특별하고 비싼 게 아니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어떻게 조리하고 섭취하느냐에 달렸다. 음식 연구를 계속 할수록 식재료와 사람이 참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겉만 보고 섣불리 판단하거나, 어쩌면 소홀히 다뤘던 인연도 내게 그토록 필요했던 사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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