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기 칼럼]2021년의 시대정신
[경향신문]
1929년 대공황에 맞서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과 정부가 제시한 뉴딜의 비전은 ‘3R’이다. ‘구제(Relief), 회복(Recovery), 개혁(Reform)’이 그것이다. 이 3R은 코로나19 팬데믹에 맞선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이 가운데 맨 앞에 놓인 구제는 의학적 구제와 경제적 구제로 나뉜다. 의학적 구제는 백신 보급이 관건이다. 올겨울까지 대다수 나라들이 백신 보급을 완료함으로써 2년 동안 갇혀 있던 팬데믹의 어두운 터널에서 벗어날 것이다. 지구적 차원에서 1월4일 현재 9000만명에 가까운 확진자는 올해 1억명을 훌쩍 넘길 것이고, 200만명에 육박하는 사망자 역시 300만명에 가까이 도달할 것이다. 어느 나라든 백신 보급이 신속히, 원활히 이뤄져야 할 까닭이다.
경제적 구제는 경제적 회복과 긴밀히 연관돼 있다. 어느 나라든 코로나19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부분은 소상공인 등 제조업과 서비스부문이다. 따라서 코로나19가 완전히 종식될 때까지 긴급 생활 지원은 물론 사업 복구 지원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경제가 직면한 최대의 위기인 만큼, 경제 살리기를 위한 재정 확대는 올해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핵심은 개혁이다. 루스벨트 정부가 선택했던 개혁의 방향은 사회적 대타협으로서의 사회계약이었다. 뉴딜은 정부·기업·노동자가 사회계약을 맺게 해 생산성과 형평성을 동시에 제고하는 ‘정치적 교환’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1935년 제정된 와그너법은 이를 위한 제도적 장치였다. 팬데믹이 지속되는 한, 안전 의제는 불평등 의제보다 우위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팬데믹이 종식되면, 불평등 완화가 가장 중대한 과제가 되고, 이를 위한 전방위적 제도개혁이 가장 시급한 과제가 될 것이다.
우리 사회의 경우는 어떨까. 2021년 한국사회의 선 자리를 예상해 보면, 다섯 가지가 특히 눈에 들어올 것이다. 첫째, 계속되는 팬데믹에 맞서 백신 보급이 이뤄지고, 이와 연동해 완만한 경제 회복이 진행될 것이다. 둘째, 4월 서울시장, 부산시장 보궐선거를 계기로 정치적 양극화가 강화되고, 2022년 3월 대통령선거를 향한 경쟁이 서서히 달아오를 것이다. 셋째, 지난해 우리 사회를 뒤흔들었던 부동산시장에 대한 국민 다수의 관심은 계속 뜨거울 것이다. 경제학자 닉 서르닉이 분석하듯 지구적 차원에서 부동산시장 거품의 이면에는 ‘자산-가격 케인스주의’가 놓여 있는 만큼, 케인스주의의 정책 기조가 바뀌지 않는 한, 각자도생 사회에서 이 거품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넷째, 저출산과 고령화로 대표되는 인구 절벽의 압박이 더욱 거세질 것이다. 다섯째, 여름쯤 미국 조 바이든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가 가시화되면, 남북관계를 포함한 동북아 대외관계 구도가 출렁거릴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 이제 문재인 정부는 서서히 국정 과제들을 정리해야 하는 시기로 들어서고 있다. 돌아보면, 문재인 정부는 집권 초반기에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을 적극적으로 추구했고, 집권 중반기에는 ‘혁신적 포용국가’를 전면에 내세웠으며, 후반기에는 예기치 않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한국판 뉴딜’에 주력해오고 있다.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 그리고 혁신적 포용국가는 올가을부터 가시화될 대선 과정에서 본격적인 평가가 이뤄질 것이다. 2021년 올해 문재인 정부에게 부여된 가장 중대한 과제는 한국판 뉴딜이 내건 단기적 위기 극복과 장기적 미래 비전을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지에 놓여 있을 것이다.
내가 던지고 싶은 질문은 팬데믹의 출구가 희미하게 보이는 올해, 무엇이 시대정신이 될 것인지의 물음이다. 역사는 반복하지 않지만 교훈을 안겨준다. 이점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하면 대공황에 맞선 구제, 회복, 개혁은 우리 사회에서도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다. 팬데믹으로부터 우리 삶을 보호하는 안전과 자산·소득을 포함한 불평등 해소가 2021년 시대정신으로 자리매김돼야 한다.
내년 3월 대선으로 가는 올 한 해 정치사회의 조건을 주목할 때, 정치적 양극화를 완화하고 국민통합을 이루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목표일지 모른다. 정치의 계절에는 외려 시대정신을 실현하기 위한 과제들에 대한 치열한 논쟁과 그것들의 정책적 구현을 통해 결과로서의 사회통합을 성취하는 것이 실현 가능한 과정일 것이다. 팬데믹 극복을 위한 회복과 개혁에 대한 담론 및 정책들이 생산적으로 경쟁하길 나는 소망한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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