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와 10년 숨바꼭질 어산지, 당장 송환은 피했다
미국 정부 기밀 문서 수십만 건을 해킹한 뒤 폭로해 전 세계를 뒤흔든 폭로 매체 ‘위키리크스’의 창립자 줄리언 어산지(49)에 대한 미국 정부의 범죄인 송환 요청을 영국 법원이 불허했다.
런던 중앙형사법원은 4일 오전(현지 시각) 어산지에 대한 미 검찰의 범죄인 송환 요구를 거부했다. 가장 큰 이유로 그의 정신 상태를 꼽았다. 지금 미국으로 보내면 자살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미 정부는 바로 항소하겠다고 했다. 이로써 그의 송환 여부 결정은 시간이 더 걸리게 됐다.
앞서 미국은 2019년 어산지를 1급 스파이 범죄 등 18개 혐의로 기소하고, 영국 측에 어산지의 송환을 요청했으며, 영국 정부는 이를 수락했다. 이후 그의 송환 여부를 둘러싸고 법정 다툼을 이어왔다. 그가 미국으로 송환돼 재판받으면 최고 175년형이 선고될 수 있다고 한다.
호주 출신의 어산지는 그간 ‘진실을 폭로한 정의로운 혁명가’ ‘연예인급 인기에 취한 희대의 해킹 테러리스트’라는 엇갈린 평가 속에 격렬한 논란을 불러일으킨 인물이다.
16세 때부터 해킹으로 돈을 번 그는 2006년 위키리크스를 창립했다. 2010년부터 2011년 사이 미 국무부와 국방부, 연방수사국(FBI) 등 주요 국가기관 관료들이 주고받은 기밀 문서와 민감한 외교 전문(電文) 25만여 건을 해킹한 뒤 폭로해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특히 주목을 끈 것은 이라크전 당시 미군이 바그다드의 민간인을 공습한 영상과 관타나모 테러범 수용소의 인권 탄압 실태를 2010년 공개한 것이다. 이는 해외 주둔 미군 철수론을 촉발한 기폭제가 됐다.
미국의 수배를 받던 그는 기밀 폭로와 별개로 2010년 위키리크스 서버를 둔 스웨덴에서 현지 여성 2명을 성폭행한 혐의 등으로 국제 체포 영장이 발부됐고, 결국 영국 경찰에 체포됐다. 당시 성관계 자체는 합의에 의한 것이었으나 어산지가 콘돔 사용을 거부한 게 문제가 된 모호한 사건이었는데, ‘미국이 놓은 덫’이란 말도 나왔다.
그는 후원자들 덕에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2012년 영국 대법원이 그를 스웨덴으로 송환하라는 결정을 내리자 나중에 미국으로 송환될 것을 두려워해 런던 주재 에콰도르 대사관에 숨어든 뒤 망명 신청을 했다. 에콰도르 좌파 정권은 반미 전선의 상징적 인물을 받아줬다.
어산지는 이후 7년간 치외법권 지역인 대사관에 틀어박혀 각국 언론 인터뷰나 유력 인사들과의 만남을 통해 여론전을 펼쳤다. 이 기간 대사관을 드나든 남아공 출신의 11세 연하 변호사와의 사이에 아이 둘을 낳기도 했다.
미 진보 진영에서마저 그에 대한 인식이 나빠진 계기는 2016년 미 대선이었다. 각국 공조를 통해 자신을 추적한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에 대한 원한이 컸던 그는 대선 당시 러시아의 후원 속에 클린턴의 이메일 스캔들을 폭로해 트럼프 대통령 당선에 일조했다. 어산지 측은 최근 미국 송환 가능성이 높아지자 트럼프에게 사면 요청을 했으나 거부당했다.
어산지의 입지가 좁아지자 2019년 에콰도르 정부는 7년 만에 그를 대사관에서 추방했고, 즉시 그는 영국 경찰에 체포돼 런던의 한 교도소에 수감됐다. 당시 몰라보게 늙고 횡설수설하는 모습이 화제가 됐다. 그는 최근 건강이 더 악화된 것으로 전해졌다. 영국 법원이 이번에 송환 요청을 거부한 것도 그런 상황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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