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을 통과한 시대의 증언

김예진 2021. 1. 4.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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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소·제니 홀저 개인전
‘무제 0201012’(왼쪽), ‘무제 0200815’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제공
서울 종로구 소격동 일대 미술 골목에서는 최근 검열의 시대를 통과한 예술작품들의 회고전이 한창이다. 시대와 국경을 넘어, 성별을 달리하는 두 예술가,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만의 치열한 예술 세계를 구축해온 두 예술가가 우연히 만들어낸 교집합이 흥미롭다. 바로 한국을 대표하는 최병소 화백과 미국의 대표적 현대미술가 제니 홀저다. 두 작가의 개인전이 각각 소격동 아라리오갤러리와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70년대 저항의식 담은 실험적 작품 묵직한 울림… 최병소 ‘검열의 시대’ 신문지를 칠하다

아라리오갤러리의 최병소 화백 개인전 ‘의미와 무의미(意味와 無意味 SENS ET NON-SENS: Works from 1974 to 2020’는 최 화백 예술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1970년대 초기 작품과 최근의 작품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다.

전시장에서 만나는 신문 지우기 연작은 그의 상징적 작품들이다. 1970년대 시작된 신문지 연작은 독재 정권 하에서, 신문을 보던 청년 최병소가 의미가 사라진 신문지를 연필과 볼펜으로 까맣게 칠해나간 데서 시작됐다. 신문지에 연필을 칠하고 그 위를 다시 싸구려 볼펜으로, 그렇게 먹지처럼 변해버린 신문지 위를 다시 연필로, 볼펜으로 칠해나갔다. 마침내 새까맣게 변한 신문지는 단색조의 추상화가 됐고, 시대의 어둠처럼 보이기도 했다. 찢긴 부분은 추상화의 비정형 패턴이 됐고, 한 시대의 상처처럼 보이기도 했으며 찢긴 틈새로 보이는 하얀 배경이나 구멍은 빛이 들어서는 희망의 틈새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네모 형태가 유지되는 질긴 신문지는 노동이 집약된, 열망으로 가득한 신문지로 새로 태어난 것처럼 보였다.

최 화백은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이 같은 신문지 연작을 이어왔다. 저항의식을 담은 실험미술의 대가이면서도, 동시에 현실참여 민중미술과는 결을 달리하며 발전해온 단색조 추상미술의 태동을 알린 작품으로도 평가됐다. 한국 미술사에서 최병소만의 독특한 자리를 만든 셈이다.

희소성이 높은 그의 사진작품을 볼 수 있는 것도 이번 전시의 볼거리다. 과거 최 화백의 대구 작업실이 침수되면서 1970∼80년대에 제작된 작품 대부분이 유실 또는 파손됐다. 이때 단 두 점이 살아남았다고 하는 1970년대 사진작품이 이번 전시에서 소개된다. 내셔널지오그래픽 잡지 사진을 이용해 만들어진 1975년 작품과 의자 위에 사물을 놓고 촬영한 사진과 문자를 결합한 1975년 작품이다. 신문지와 연필, 볼펜, 분필, 안개꽃, 세탁소의 하얀 옷걸이. 그의 개인전을 채우고 있는 사물들은 여전하다. 하나같이 청년 최병소가 구했던 일상의 물건들이다. 특히 전시장 지하에 펼쳐진 광경은 관람객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바닥을 가득 채운, 눈 덮인 듯 새하얀 단색조의 바닥은 세로 7m, 가로 4m 면적에 구부러진 옷걸이 약 8000개로 만들어진 설치 작품. 일상의 편에서 변치 않은 사람 최병소, 그의 반예술적 태도와 함께, 하찮은 것들에 대한 사랑이 변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궁극의 죄악(ultimate sin)’ 국제갤러리 제공
◆검열의 흔적, 금빛·은빛으로 가득채운 당대의 열망… 제니 홀저의 금빛 기밀문서

최병소의 캔버스가 된 까만 신문지들이 묵직한 울림을 준다면, 제니 홀저의 캔버스가 된 기밀문서들은 금빛, 은빛으로 반짝이며 당대의 열망을 뜨겁게 표출한다.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생생한 공상을 하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IT’S CRUCIAL TO HAVE AN ACTIVE FANTASY LIFE)’에서다.

제니 홀저는 1990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여성 작가 최초로 미국관을 대표한 작가로, 언어, 문자를 소재로 작업해왔다. 다양한 메시지들을 디지털로, 회화로, 설치로 만들어왔다. 문자를 영상으로 흘려보내고, 캔버스에 그리고, 대리석에 새기기도 하며 시각으로, 때론 촉각으로 관람객들에게 말을 걸어 왔다. 그런 그가 이번에 주된 소재로 택한 문자는 다름 아닌 미국 행정부에서 생산된 기밀문서들.

그는 정보공개법에 따라 정부의 기밀 해제 문서들이 공개되지만, 보안을 이유로 상당 부분을 까맣게 칠한 채 공개된 문서들을 캔버스에 바탕으로 깔았다. 이를 검열의 흔적이라 여기는 작가는 그 자리마다 금박을 입혔다. 금박의 가로 막대들이 가득 채운 거대한 화면은 아름다운 금빛 추상화가 된다. 동시에 검열의 크기, 검열의 강도를 더 생생하게 드러내는 장치가 돼 강렬한 정지적 메시지를 전한다. 이따금씩 보이는 ‘secret(비밀)’이라는 문자와 쪽수 표시만이 기밀문서라는 흔적을 보여준다. 가려진 기밀문서, 알맹이 없는 정보 공개가 결국 추상화나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전시에서 발견하게 되는 정치적 유희까지 흥미롭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탄핵 위기까지 몰고 갔던 2016년 대선 러시아 개입 의혹과 이후 사법 방해 등을 조사한 ‘뮬러 보고서’는 이번 전시에서 가장 주된 소재다. 최신 수채화 연작으로 전시장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희미한 보고서를 바탕으로 온갖 붓을 빤 물감통 속 물처럼 탁하고 어두운 색들이 화면을 오염시키려는 듯 여기저기 흘러내린 모습이다. 제기된 의혹, 의혹 조사에 대한 권력의 방해, 그로 인해 근거 없다는 결론 뒤에도 계속되는 의심과 정치적 대립, 미궁에 빠진 진실, 불신과 분열이 미국 사회를 장기간 혼란으로 밀어넣는 모습을 세계는 목격했다. 수채화 연작은 그 시간 중 한 단면을 담으려는 시도로 보인다.

미술계에서는 통상 오랜 시간을 지난 예술작품에서 더 큰 아우라를 발견하곤 하지만, 대선을 갓 치른 미국에서 건너온 따끈따끈한 정치적 작품들이 가진 생생함을 느껴보는 것도 큰 재미다. 두 전시는 회고를 통해 오늘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아느냐고 묻는다. 검열이 희미해지는 대신 자유를 명분으로 혐오가 들어서는 시대, 공을 넘겨받은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어떤 민주주의를 만들어 나가야 하는지, 그 숙제 앞에 서 있다. 최병소 개인전은 다음달 27일까지, 제니 홀저 개인전은 이달 31일까지다.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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