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병수당' 없는 나라..병 키우는 노동자들

이효상 기자 2021. 1. 4.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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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OECD 국가 중 한국이 유일
방역수칙 ‘아프면 쉬기’ 무색
직장인 62% “유급병가 없어”
콜센터 등 조건 열악할수록
생계 등 이유로 병가 못 써

한 공공기관 콜센터에서 일하는 상담사 A씨(46)의 새해 소망은 ‘아플 때 쉬기’다. 그는 지난해 7월 신장이 세균에 감염되는 신우신염에 걸렸다. 3년 전부터 앓은 방광염이 급성 신우신염으로 발전했다. 방광염은 쉴 새 없이 전화를 받느라 화장실을 제때 못 가는 콜센터 상담사들이 자주 걸리는 병이다. 특히 지난해에는 코로나19로 업무량이 크게 늘었다. A씨가 일하는 콜센터는 지난해 질병관리본부(청) 1339 콜센터로 걸려온 전화를 나눠 받았다.

2주간 병원에 입원한 A씨는 최소 2주의 추가 요양이 필요했지만 1주만 쉬고 콜센터로 복귀했다. 쉬는 기간이 길어지면 월급이 깎일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는 4일 “5인 가족인데 남편도 자영업자라 코로나19 타격이 컸다”며 “나까지 무급으로 길게 쉬면 한 달 생활이 안 돼 일찍 복귀했다”고 말했다. A씨는 방광염이 재발할까봐 화장실을 자주 가고, 물도 많이 마시고, 일어서서 전화를 받는다. 그는 “다시 이런 일이 생길까봐 노이로제에 걸렸다”며 “일하다 아픈 것은 유급으로 지원해줘야 한다”고 했다.

‘아프면 3~4일 집에서 쉬기’는 코로나19 개인 방역의 핵심수칙이지만 현실에선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병가에 대한 법 규정이 없는 데다 아픈 기간 소득을 보장하는 상병수당제도도 없어 노동자들이 병가 사용을 꺼리기 때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법정 병가와 상병수당 제도가 없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이런 현실은 직장갑질119가 지난해 9월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확인된다. 응답자의 62%는 ‘직장에 유급병가제도가 없다’고 답했는데, 정규직(51.7%)보다 비정규직(77.5%), 노조가 있는 사업장(26.8%)보다 노조가 없는 사업장(72.0%)에서 빈도가 높았다. 병가가 무급일 경우 ‘집에서 쉰다’는 응답은 53.6%에 불과했다. 노동조건이 열악할수록 아파도 쉬지 못할 가능성이 높은 셈이다.

시중은행 하청업체가 운영하는 콜센터에 근무하는 B씨(33)는 지난해 업무 스트레스로 안면마비 증상을 겪었다. 병원에서는 3개월 요양을 권했지만 B씨는 한 달 반 정도만 쉬고 복귀했다. 회사가 병가 일수를 제한한 데다 월급 손실도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한 달 넘게 쉬면서 소득이 끊긴 B씨는 마이너스통장을 개설해 200만원 빚을 냈다. 회사는 산재신청도 안 된다고 했다. B씨는 “필요한 기간만큼 병가를 쓸 수도 없게 해서 업무에 복귀해 야간에 하는 병원을 다녔다”며 “코로나라도 걸리면 일을 못한 기간 동안 임금의 70%가 나온다는데, 아플 때 30%라도 나오면 좋겠다”고 했다.

하지만 상병수당, 유급병가 도입 움직임은 더디다. 정부는 올해 관련 연구용역을 거쳐 2022년부터 저소득층 대상 시범사업을 실시할 계획이다.

박점규 직장갑질119 운영위원은 “정부가 아프면 사나흘 쉬라는 방역수칙을 발표한 지 10개월이 지났는데 아직까지 유급병가제도를 도입하지 않고 있다”며 “비정규직, 특수고용직 노동자 등 유급병가제도 사용이 어려운 계층에 대해서는 상병수당제도를 시급히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효상 기자 h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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