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면] 정치의 사법화, 사법의 정치화를 비판한다 / 박지웅

한겨레 2021. 1. 4.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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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웅ㅣ변호사

미국 헌법사에 획을 그은 사건으로, 19세기 초반의 ‘마버리 대 매디슨’ 판결이 있다. 헌법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면 누구나 알 만한 판결이다. 미 건국 초기, 마버리라는 연방대법관 후보자는 신임 제퍼슨 대통령이 자신을 연방대법관 후보자로 임명하지 않자, 신임 국무장관이던 매디슨을 상대로 직무집행영장(임명장을 배부하게 해달라는 내용)을 발부해달라고 한 사건이다. 1803년, 당시 연방대법원장이던 마셜은 묘수를 내는데, 매디슨이 마버리에게 임명장을 교부하지 않은 것은 법률상 적법하지 않지만, 임명장을 내어주라고 강제할 권한이 헌법상 연방대법원에는 없다고 판결한 것이다. 최근 대한민국에서도 흔히 전·후임 대통령의 공직 임명을 놓고 볼 수 있는 갈등 장면이다.

위헌법률심사권을 확립하며 입법·행정권에 비해 당시 보잘것없던 사법권을 정립한 데에는 역설적으로는 사법 자제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정치권력의 갈등은 정치권력 내에서 해결해야지, 정치권력이 사법부에 옳고 그름의 판단을 맡기는 것을 자제해야 한다는 뜻이다. 정치권력이 사법에 자신의 판단을 의존하거나, 또는 잘잘못을 따지게 하는 것은 곧 국민으로부터 통치권력을 위임받지 않은 사법부에 무기력하게 ‘권력을 이양’하는 꼴이 된다.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요새 대한민국 헌법의 풍경은 막장드라마에 가깝다. 대부분의 전직 대통령이 탄핵은 물론 사법 심사의 대상이 되었다. 모든 정당의 후보자들은 선거 때마다 자신의 목줄을 검찰에 맡기고, 국회의원들은 국회법과 전례에 따라 처리해야 할 정당 간의 충돌 문제를 고소·고발장을 가지고 무조건 법원과 검찰에 들이댄다. 국회선진화법은 검찰개혁법, 선거개혁법 앞에서 모두 무력화됐다. 각 당의 국회의원들과 보좌진, 당직자들은 모두 사법 심사의 대상이 되었다.

역으로 검찰은 고도의 정책적 판단 사항이라 할 수 있는 ‘탈원전’의 문제를 수사의 칼을 들어 대통령을 겨냥한다. 다른 정치적 사안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과거 고도의 정치적 재량 행위는 사법 심사의 대상에서 자제해야 한다는 전통도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 같다. 이러한 검찰총장을 제어하려다 보니, 더 큰 무리수를 뒀다. 검찰총장 직무배제·징계 제도를 동원해 검찰총장을 사법 심사의 대상으로 삼았다. 법무부 장관, 대통령 모두 결국 큰 정치적 부담을 떠안게 됐다. 정작 정치가 실종됐다.

정치가 극한으로 가니, 정치와 사법 간의 인력 이동을 완전히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힘을 얻는다. 현 야당에서는 정치에 참여한 사람이 사법기관(법원·검찰)에 종사하는 데 3년간 제한을 걸고(현 집권 여당에서 일부 반대는 있었으나 결국 지난해 2월에 합의 처리됐다), 21대 국회에서는 역으로 일부 야당에서 사법기관에 종사한 사람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퇴임 후 1년간 금지하는 법안을 냈다. 양쪽 모두 포퓰리즘에 불과하다. 훌륭한 재판관과 정치인의 조건이 가치의 ‘중립’은 아니지 않은가? 중립은 곧 가치판단을 보류하는 것에 불과한데 말이다.

‘사법의 정치화’는 곧, ‘정치의 사법화’에 다름 아니다. 사법의 정치화를 바로잡기 전에, 정치권력 스스로 그 본질적 가치를 되찾아야 한다. 정치는 갈등을 해결하는 일이며, 국민의 합의를 도출하는 일이다. 정치투쟁의 주요 분쟁 요소인 공직선거 제도의 행위제한·금지를 대폭 풀어버리고, 국회운영 제도의 원칙을 다시 정립하면 어떠할까? 더 근본으로 선출직의 많은 권한을 같이 내려놓게 하면 어떠할까? 제왕적 대통령제를 제한·개편하려는 헌법적 합의는? 그러한 틀 아래에서, 정치권력에 대한 사법의 개입 자제를 논할 수 있지 않을까? 정치가 하도 본질을 잃고 희화화되니, 사법권력이 국민이 뽑은 정치권력을 언제든지 위협하는 시대가 된 것이 아닐까? 사법의 정치화는, 정치의 사법화의 반작용이다. 정치 스스로 개혁과 합의의 정신을 다시 생각해볼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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