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융합] 태초에 융합이 있었지만..

한겨레 2021. 1. 4.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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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융합]정희진의 융합 _14
이십대 청년이 ‘정희진의 융합’을 먼저 읽고 그리다. 김우석
문명은 융합의 과정이자 산물 문제는 ‘어떤 융합’이 필요한가라는 정치적 선택 연대는 융합의 대표적 방식 그러나 한국 사회운동의 연대는 대의와 약자를 대립시켜 ‘융합’이 아니라 절합(折合)적 사고가 필요

“아버지(master)의 연장으로 아버지의 집을 부술 수 없다.” 이 말의 주인공, 미국의 시인 오드리 로드(1934~1992)는 페미니스트, 흑인, 동성애자, 유방암 환자로 살았다. 그녀는 자기만의 언어로 현실을 인식하고 변화를 추구했다. 나는 이러한 상황이 그에게만 국한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 언어는 ‘중층’의 억압 속에 살았던 그녀에게뿐만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조건이다.

지난해, 반가운 ‘말’이 있었던가. 긍정적 사고가 쉽지 않은 시절이다. “울지 마라, 내일은 더 힘들 것이다.” 올해도 이 말을 간직해야 할 것 같다. 연말연시, 나의 인사는 “세상이 곱게 망하기를”, “시간차 없는 동시 멸망으로 상실의 고통이 없기를…” 따위였다. 수많은 잘못과 실수를 저질렀던, 나 자신에게 한 말이기도 했다.

이 글에서 언어의 사회적 기능을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언어의 역할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언어는 매일 마주치는 삶의 장벽이다. 나는 소통의 불가능성에 희망을 걸겠다. 소통이 가능하다는 환상은 절망과 분노로 바뀌기 쉽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말들은 대개 나와 무관한 이들이 만든 말, 소위 이데올로기이다. 물론 그런 말조차 마음껏 표현하지 못하는 인생이 대다수다. “속 시원히 한번 말해봤으면” 같은 소망을 가져보지만, 그 말을 누가 들어줄 것인가도 문제다. 이 시대 사회관계망(SNS)은 자기 말을 들어줄 사람을 찾아 헤매는 이들의 몸부림이 아닐까. 코로나 시국에 소위 유명인들이 모여 와인을 마시든 파티를 하든 누가 알겠는가. 그들 자신의 업로드로 알려진다. 욕을 먹어도 좋으니 자기를 봐달라는 이들의 표정은 행복하다.

말이 안 통하는 세상이니, ‘아버지의 도구’조차 제대로 기능하는 경우가 드물다. 아니, 그래서 ‘아버지의 연장’일까. 정확한 인식을 방해하는 단어가 산더미다. ‘노동시장 유연성’, ‘성희롱’ 등 노동과 젠더에 관한 번역어들은 현실을 완전히 왜곡한다. 기존의 언어를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기 검열과 사회적 검열까지 겹치면 침묵이 답이다(글을 쓰지 말아야 한다). 침묵은 완벽한 좌절 혹은 들끓었던 몸이 소진된 상태다.

원래 문명은 융합의 산물

나는 예전부터 미국 사회에 대한 표현 가운데, 인종의 용광로(鎔鑛爐, melting pot)라는 말이 이상했다. 비유가 현실과 정반대다. 용광로라면 인종 차별이 없어지고 ‘하나의 쇳물’이 되어야 하는데, 미국은 이를 ‘트럼프’로 해결하려던 사회다. ‘용광’ 될 날이 없을 것 같다. 현재 미국의 인종 구성은 ‘백인’이 66%, 히스패닉 15%, ‘흑인’ 13%, 아시아계 6% 정도로 알려져 있다. ‘혼혈인’, 1%가 넘는 원주민은 포함되지 않은 수치다. 미국은 다양한 사회가 아니다. 백인 문화가 용광로를 운영한다. 그들은 용광로에 들어가지 않는다.

융합도 용광로와 마찬가지로 제대로 된 지시어가 아니다. 나는 융합에 대해 쓰는 어려움보다 융합의 기존 어감과 이미지, 통념과 싸우는 시간이 더 많다(그러다 보면 마감이다). 융합은 융합을 설명하는 데 적절한 단어가 아니다. 누군가 규정해놓은 ‘틀린’ 말을 내 입장에서 설명하려니, 서두에 말한 대로 ‘융합’은 내게 거대한 장벽이다.

문명은 융합의 산물, 이미 세상은 융합되어 있다. 독자적이고 순수한 형태의 문화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든 현실은 알 수 없는 이유다. 코언 형제의 영화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에는 ‘운동가’들을 위한 의미심장한 대사가 나온다. “현실을 변화시키려고 하지 마. 그러려면 현실을 인식해야 하는데, 그 순간 현실이 달라지거든.”

현실은 잡히는 대상이 아니다. 매 순간 변화하고 이동한다는 의미에서, 태양 아래 모든 것은 새롭다. 그러므로 융합 그 자체는 중요하지도 않고 무조건 추구할 가치도 아니다. 문제는 어떤 가치를 위한 융합인가이다. 진짜 융합은 인간의 필요에 의한 대단히 목적의식적인 작업이다. 그런 면에서 지금 ‘백신’은 융합을 상징한다. 안보 신화를 종식시킬 수 있는 논리, 무의미한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논리, 한국 현대사에서 ‘검사 집단’을 파악할 수 있는 인식… 이런 논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융합이다.

주류 언어가 나의 삶을 삼켜버릴 때, 현실이 교착 상태에 빠져 공동체가 고통받을 때, 융합은 새로운 말을 찾는 과정이다. 창의적 사고가 왜 필요한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인 것이다.

합치지 말고 분절하라

어쨌든 ‘융합’을 그대로 사용해보자. 융합은 학문 간 대화의 필요성에서 제기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보다 본질적 차원에서는 정치적 요구에 의해서였다(학문 간 소통도 정치다). 동맹, 제휴, 통일전선, 연대… 맥락에 따라 융합은 여러 가지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애초 통섭(通攝)으로서 융합은 서구에서 페미니즘과 포스트 마르크스주의가 발전시켰다. 근대에 탄생한 대부분의 지식처럼, 영어 표현을 빌리는 것이 빠르다.

내가 생각하는 융합의 가장 근접한 번역은 ‘횡단(橫/斷)의 정치(trans/versal politics)’다(첫 회에 썼다). 글자 그대로, 횡단보도는 필요한 구역마다 길을 가로질러 ‘끊어놓은 것’이다. 교통량이 적은 지역에는 횡단보도가 많지 않다.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횡단의 정치는 직선적 사고가 아니라 교차하거나 기존 의미의 문지방을 넘어(횡단해) 사회 변화(trans/formation)를 추구한다. 며칠 전 읽은 책에서, 트랜스내셔널(trans/national, 국가 경계를 넘어서)을 “관국가적”이라고 번역한 표기를 보았다. 한자 병기도 없었는데, 아마 가로질러 관통(貫通)한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 같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융합’은 융합의 반대말이다. 원래대로라면, 융합 개념은 ‘절합’에 가깝다. 절합(折合, articulation). 모든 질서는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절합이다. 이 단어는 관련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흔히 쓰이지만, 현재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등재되어 있지 않다. 관절(joint)이란 뜻의 라틴어 ‘articulus’에서 비롯되었다. 하나하나 구분되는 마디. 법률 조항(an article of law)도 여기서 나왔다. 구분한다는 뜻이 강해서, “또렷이 생각을 밝히다(articulate an idea)”가 되었다. 트레일러가 딸린(jointed) 트럭도 ‘an articulated truck’이라고 한다니, 관절(關節)의 이미지가 선명하다.

하나로 화(化)하여 합친다는 ‘융합’으로 차이를 분명히 하자는 ‘절합’을 설명하려니, 다시금 아버지의 연장―언어의 식민성―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진보 진영에서 많이 사용하지만, 가장 실천과 거리가 먼 단어는 ‘연대’와 ‘성찰’이 아닐까. 융합에 대한 최악의 이해는, 연대다. 통용되는 연대 개념은 “우리가 99%(?)이니, ‘나쁜’ 1%(?)를 제거하자”는 논리다. 문제는 99% 안에 광범위한 갈등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정치는 갈등의 교차 영역에서 발생한다. 한 가지 억압이 위에서 아래로 찍어 내리는 것이 아니다.

노학 연대, 청년 빈민 연대, 성소수자 연대,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 그런데 연대 과정에서 각 집단이 등가 사슬(chain of equivalences), 즉 하나의 ‘마디(아티클)’이 되지 못하고 약자는 연대에 동원된다. 여성이나 장애인 이슈는 인구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대동단결, 일치단결의 ‘대의’ 속에 종속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대의를 약자와 대립시킨다. 예를 들면 “민족 문제냐, 여성 문제냐”(이 말 자체가 여성을 민족에서 배제한다). 장애인 문제는 시혜적이고, 성소수자 문제는 “나중에”다. 이것은 융합도 절합도 아니고, 폭력이다. 심지어 대동단결과 일치단결 중 무엇이 옳은가를 놓고 싸운 시절도 있었다.

한국 사회는 융합 이전에 융합할 수 있는 사고방식과 언어가 부재한 사회다. 왜 우리는 ‘인문학 강국’이 아닐까(“왜 노벨 문학상을 못 탈까”). 표절 논란이 끊이지 않는 사회. 최근 ‘역사를 방송하는 분’의 표절은 내가 아는 한, 점잖은 편이다. 더 심각한 일이 부지기수다. 한편, 표절로 방송에서 물러나면 그만인가. 남의 글로 획득한 부가 가치는 환원되어야 하지 않나. 형법 위반 사항은 없는가? 다음 회는 절도(표절)와 융합에 관한 이야기이다.

※ 이 글은 아이디 stenka25님을 비롯, 여러 독자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정희진 ㅣ 여성학 연구자·문학박사. 글쓰기와 책읽기를 좋아한다. ‘논문, 비평, 수필, 편지, 칼럼’ 등 글의 장르는 없다고 생각한다. 여성학 연구자로서 공부의 목적은, 기존의 논쟁 구도와 전선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여성주의와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한국 현대사를 재해석하는 데 관심이 있다.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는다. tobrazi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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