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사면의 정치학

이동훈 논설위원 2021. 1. 4.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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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면법은 1948년 정부 수립 후 정부조직법에 이어 만들어진 대한민국 ‘제2호법’이다. ‘조국 광복의 기쁨을 같이하고 재생의 기회를 부여하기 위하여’라고 입법 이유가 달렸다. 그해 9월 건국대사령(大赦令)이 공포돼 6700여명이 석방됐다. 교도소가 거의 텅 빌 정도였다. 사면법은 예나 지금이나 세부 규정이 없다. 법 자체가 정치적으로 알아서 사면하라는 취지이기 때문이다.

/일러스트

▶정부 수립 후 대통령이 행사하는 특별사면이 99차례 있었다. 국회 동의가 필요한 일반사면이 7차례 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과 비교된다. 박정희 정부 25차례, 전두환 정부 18차례 등 정치적 억압 수준이 높을수록 특사 빈도가 높았다. 임기말 사면은 역대 정부에서 빠지지 않고 실시됐다. 주로 대통령 측근과 전 정권 인사들이 혜택 받았다. 매번 법치주의 훼손을 우려하는 반대와 국민 화합 등을 내세운 찬성이 맞섰다.

▶정치적 파급이 컸던 것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사면이다. 1997년 대선 직후 김영삼(YS) 대통령과 김대중(DJ) 당선자가 만나 전두환·노태우 사면을 결정했다. YS는 회고록에서 “DJ는 내 말에 아무 의견을 제시하지 않고 그저 ‘좋습니다’라고만 했다”고 했다. 하지만 DJ 측은 “당선되자마자 사면을 요청했다”고 했다. 당시 여야 모두 대선에서 전·노 사면을 공약으로 내걸 만큼 분위기는 무르익어 있었다.

▶미국 포드 대통령은 워터게이트로 사임한 닉슨을 이어받아 취임했다. 취임 한 달, 포드는 참모들 만류에도 “분열과 증오를 딛고 미래를 시작해야 한다”며 닉슨을 사면했다. 지지율이 70%대에서 40%대로 곤두박질쳤다. 포드가 닉슨과 ‘거래’했을 거라는 음모론에 “포드도 감옥으로(Jail Ford)”란 구호까지 등장했다. 포드는 2년 뒤 대선에서 졌다. 하지만 한 세대를 지나 평가가 달라졌다. 미국 역사상 가장 용기 있는 결단의 하나가 됐다. 케네디의 딸 캐럴라인은 2001년 ‘JFK 용감한 시민상’을 포드에게 주면서 “자신의 정치적 미래보다 나라를 더 사랑한 사람”이라고 했다.

▶민주당 이낙연 대표가 꺼내 든 ‘이명박·박근혜 사면론’에 여권 지지층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 정권은 국민 통합을 다짐해놓고 임기 내내 적폐 청산이라며 보복만 했다. 분열과 증오를 조장했다. 그러다 선거를 앞두고 사면론을 꺼내 드니 지지자부터 반발하는 것이다. 현 정권이 자초한 일이다. 그럼에도 각각 80세, 69세인 두 전직 대통령들이 20년 안팎 형기를 끝까지 채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더 방치하면 시대의 상처는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 나라 미래를 생각하는 대통령의 정치력과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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