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애정남'의 결단이 보고 싶다

이관후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2021. 1. 4.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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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정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학 때 은사님은 종종 ‘애정남’이라고 답하셨다. 그렇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개그콘서트>(KBS) 코너명이다. ‘애매한 것을 정해주는 남자.’ 정치란 애매한 것들 사이에서 선택과 판단을 하는 것이다.(정치를 남자가 해야 한다는 뜻은 물론 전혀 아니다)

이관후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그렇다고 정치가 늘 무언가를 정하기만 해서는 좀 문제가 있다. 사실 선생님이 정치를 애정남이라 부를 때는 항상 ‘운동’이라는 짝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운동에 해당되는 코너 제목은 ‘불편한 진실’. 제도 정치가 자리 잡은 곳에서는 야당 역시 비슷한 역할을 한다. 겉으로 평온해 보이는 세상에서 누군가는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야 하고, 누군가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물론 결정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것이 정치다.

박근혜 정부 말기에 우리가 맞닥뜨린 진실은 너무나 불편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거리에서 그 진실을 목도했고, 분노했고, 바로잡았다. ‘불편한 진실’의 다음 코너는 ‘애정남’이다. 바야흐로 통치의 시간이다. 희뿌연 안갯속에서도 누군가는 키를 잡고 배를 정한 방향으로 몰아야 한다. 정답은 없다. 정치인은 최선을 다해 선택을 내리고, 국민들은 그 결과를 평가한다. 그것이 정치다.

이 정부에서 통치는 적절히 작동하지 않았다. 이전 정부가 감춰왔던 ‘불평등’이라는 불편한 진실이 밝혀졌다. 그 대안으로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을 두고 정책실장과 경제부총리가 힘겨루기를 할 때, 우리는 애정남을 필요로 했다. 둘 다 선의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 선의들 사이의 선택을 이 정부는 어려워했다.

정권 초반 부동산 해법으로 다주택자를 주택임대사업자로 양성화하려는 정책을 시도했다. 선의였을 것이다. 그러나 집값은 고공행진을 계속했다. 3년 만에 이 정책은 완전히 뒤집혔다. 그럼에도 청와대에서도 행정부에서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사실 누군들 대한민국 부동산에 대해 완벽한 해법을 갖고 있겠는가. 애매한 문제다. 그러나 애매한 것들 사이에서 결정을 내리고 책임을 묻는 것이 정치다. 누가 봐도 명약관화한 일을 결정해놓고 정치적 선택을 잘했다고 할 수는 없다.

코로나19와 같은 재난을 국가가 선택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응은 나라별로 큰 차이가 있다. 더 잘할 수도 있었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래도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한국의 K방역은 여전히 비교우위에 있다. 문제는 고비 때마다 리더십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1차 추경부터 시작해, 재난지원금이 3차까지 이어지는 동안, 청와대는 대체로 사태를 관망했다. 정책실과 부총리가 여당이나 지자체장들과 거친 대결을 펼칠 때, 청와대는 침묵했다.

대통령이 임명한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이 마치 자기들이 봉건시대의 칼잡이나 된 듯이 객기 어린 말을 주고받으며 치고받을 때, 국민들은 이를 가십으로 삼고 비웃었으나 청와대는 아무 말이 없었다. 고심은 하고 있었을 것이다. 검찰개혁이라는 대의명분을 틀렸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검찰개혁이 필요하다는 불편한 진실이 아니라, 그 개혁을 어떻게 실현시킬 것인가에 대한 애정남의 결단이었다.

‘대장’으로 불리는 한 산악인이 리더십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언제 올라갈지를 결정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언제 내려올지를 결정하는 일이다. 수년간 준비해서 정상에 거의 다 갔는데, 단 몇백 미터를 남기고 내려와야 할 때가 있다. 그때는 일단 가 보자는 사람은 있어도, 아무도 먼저 포기하자고는 말 못한다. 나라고 도전을 안 해보고 싶겠나. 그러나 사람들 목숨이 그 순간 내 결정에 달렸다. 다음에 다시 오자! 허탈감에 무너진 후배들을 다독거려서 내려와야 한다. 그렇게 정상을 포기하고 내려올 때가 가장 위험하다. 목표도 성취감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일행을 이끌고 베이스캠프로 내려오고 나면 나는 기진맥진한다. 그제야 정상만 생각했던 후배들이 정신을 차리고 모두 살았다며 운다.’

2021년은 사실상 집권의 마지막 해다. 산으로 따지면 하산을 준비해야 할 때다. 올라갈 때보다 더 어렵다. 게다가 보궐 선거라는 크레바스가 입을 쩍 벌리고 있다. 코로나19는 여전히 국민들의 삶과 생명을 여러 곳에서 위협할 것이고, 부동산은 위태위태하다. 불필요한 욕심을 내지 말고 필요한 일에 애정남의 결단을 내려주기 바란다. 근사하게 포장된 이벤트보다는 날 것 그대로의 정치적 결단이 보고 싶다. 그것이 모두를 살리고 다시 산을 오를 기회를 만들어 줄 것이다.

이관후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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