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의 어떤 시] [1] 기대지 않고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2021. 1. 4.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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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지 않고

-이바라기 노리코 (1926-2006)

더 이상

기성 사상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더 이상

기성 종교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더 이상

기성 학문에는 기대고 싶지 않다

더 이상

그 어떤 권위에도 기대고 싶지 않다

오래 살면서

마음속 깊이 배운 건 그 정도

자신의 눈과 귀

자신의 두 다리로만 서 있으면서

그 어떤 불편함이 있으랴

기댄다면

그건

의자 등받이뿐

(성혜경 옮김)

그래, 차라리 의자 등받이에 기대는 게 낫지. 내 삶과 동떨어진 학문이며 사상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기대지 않는” 경지에 이르기까지 노리코 여사는 엄청난 독서를 했을 게다. 이런저런 사상과 학문을 섭렵했던 자만이 그처럼 쉽게 버릴 수 있다. 내가 조선 여자라 노리코의 시에 격하게 공감할지도…. 성리학과 불교와 모더니즘을 수입해 얼른 내 몸에 둘러야 했던 변방의 먹물들. 서재 가득한 책에 포위된 지식인의 사진을 볼 때마다 숨이 막힌다.

내 나라 안방을 점령한 무슨 무슨 클래스에 열광하는, 무슨 무슨 논리에 영혼을 바치는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시. 유튜브의 시대, 내 눈으로 보지 않고 자신의 다리로 서 있지 못하고 부화뇌동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말이 없어진다면 삶은 더 간단하게 행복하거나 불행하겠지.

인간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 내가 기대는 건 스포츠. 호주오픈 테니스가 시작되기 전에 편하게 앉을 소파를 사야겠는데, 아직 맘에 드는 소파를 발견하지 못했다. 내 맘에 딱 드는 물건이 아니라면 사지 말자. 어중간한 물건을 샀다 금방 버리느니 차라리 없는 게 낫다. 오래 살면서 내가 배운 건 그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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