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춤을 추는 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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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다. 식물들이 느리게 춤을 춘다. 그 춤은 바람과 시간의 춤이다.
식물을 키울 결심을 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죽은 식물을 연극 소품으로 쓴 다음이다. 공연이 끝났는데도 작업실에 죽은 식물들의 그 희한한 자태가 남아 있었다. 공연 때는 의미와 맥락 안에 있던 것들이 더이상 기댈 곳 없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때, 살면서 가장 하지 않을 것만 같던 일, 식물 키우기를 시작했다.
공간에 빛이 어떻게 드는지 그 빛이 하루 동안 어디에서 어디로 이동하는지 알게 되었다. 처음 키우기 시작한 식물을 죽일까 봐 온종일 빛을 쫓아다니며 식물을 옮겼다. 햇빛과 흙과 물과 바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계절이 무르익고, 골목을 오가는 사람들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그들의 소리가 골목 이쪽 벽과 저쪽 벽을 치며 선명하게 울렸다.
식물이 놓이니, 벌레가 생겼다. 벌레가 생기니, 새가 날아드는 일이 많아졌다. 새들은 깃털이나 똥을 남기고 날아갔다. 앞 건물 좁은 틈에 둥지를 짓기 위해 한 가닥씩 나뭇가지를 나르는 비둘기도 보였다. 밤과 낮은 식물들을 바꿔놓았다. 아이를 키울 때 낮잠만 자고 일어나도 커 있는 아가를 느끼곤 했는데, 식물들이 시간을 누리는 방식은 인간 어른의 것과 달랐다. 해의 방향에 따라 줄기의 휨이 바뀌고 어떤 것은 가지와 가지 사이 겨드랑이에서, 어떤 것은 머리꼭지에서 새로운 줄기를 냈다. 작은 웅덩이처럼 생긴 포기 한복판에서 새잎을 내는 모습은 작은 물고기가 천천히 튀어 오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느리게, 하지만 하염없이 그들은 춤을 춘다. 그들 각자의 형상이 그 춤을 완성한다. 식물의 시간 안에 있는 야성(野性)은 아스팔트 사이에서 까맣게 잊고 있는 거대한 생태계를 상상하게 한다. 소리 내지 않아도 제 시간을 보내는 것들의 세계가 결국 세상의 대부분이다. 상상은 연결의 시작이다. 연결은 다음으로 이끈다.
이제 작업실에 죽어 있던 화분들에는 살아 있는 풀이 심겨 있다. 살아 춤을 추는 풀들이. /동이향· 2020년 차범석 희곡상 수상자
※1월 일사일언은 동이향씨를 비롯해 이채윤 텔로미어 식단 연구가, 조유진 국제문화재보존복구연구센터 세계유산 담당관, 김선자 길작은도서관 관장, 윤소정 한복 연구가가 번갈아 집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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