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역사 - 1월4일∼1월10일] '칼레의 (영국)시민'

남상훈 2021. 1. 3.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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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8년 1월 7일 프랑스가 영국으로부터 도버 해협에 면한 칼레를 가볍게 탈환한 것은 백년전쟁 초기인 1347년 영국이 이 항구도시를 빼앗을 때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백년전쟁 당시는 칼레의 군민이 합심하여 1년이나 끈질기게 저항하자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주민들을 몰살하겠다고 했다.

그런 칼레를 영국이 잃게 된 것은 메리 여왕 때였다.

따라서 에드워드 3세가 칼레 시민들을 학살했다면 다수의 영국계 시민이 죽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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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8년 1월 7일 프랑스가 영국으로부터 도버 해협에 면한 칼레를 가볍게 탈환한 것은 백년전쟁 초기인 1347년 영국이 이 항구도시를 빼앗을 때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백년전쟁 당시는 칼레의 군민이 합심하여 1년이나 끈질기게 저항하자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주민들을 몰살하겠다고 했다. 그러다 측근들의 만류로 6명만 죽이겠다고 하자 도시의 최고 부자를 비롯한 6명의 지도층이 죽기를 자원했고 이에 에드워드 3세가 감동해 사형을 보류했다는 이야기가 있어서다.

그 기록은 신빙성에 문제가 있으나 그것을 소재로 한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 ‘칼레의 시민’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상징이 돼 있다. 그렇게 영국이 차지한 칼레는 1453년 백년전쟁이 끝나 대륙에 영국의 다른 점령지가 다 없어진 뒤에도 한 세기 이상 영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칼레가 그처럼 무사했던 것은 프랑스가 당시 신성로마제국(독일)과의 전쟁이 잦은 데다 이탈리아 침공에 재미를 붙여서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런 칼레를 영국이 잃게 된 것은 메리 여왕 때였다. 메리는 기구한 인생역정 끝에 왕위에 오르자 국교회의 영국을 또다시 가톨릭으로 전향시키려고 수많은 신교도를 살해해 ‘피의 메리(Bloody Mary)’라는 별명을 얻었으니 프랑스로서는 가장 만만한 대상이었다.

그래서 칼레는 2세기 전의 끈질긴 항쟁도 없이 함락됐고 그로 인한 심리적 타격으로 메리는 “내가 죽은 뒤 내 심장에는 ‘칼레’란 글자가 쓰여 있을 것”이라고 하더니 곧 사망했다. 그러고 보면 칼레는 프랑스에 붙어 있으나 영국적인 땅이기도 했다. 그곳에는 역사상 수많은 영국인이 대륙으로 건너가던 길목이자 정착지이기도 했다.

따라서 에드워드 3세가 칼레 시민들을 학살했다면 다수의 영국계 시민이 죽었을 것이다. 영국이 칼레를 뺏긴 지 30년 뒤에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맞아 ‘칼레 해전’에서 결정타를 날린 것도 칼레와의 인연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이제는 영국이 배를 타지 않고 대륙에 닿는 입구이기도 하다.

양평(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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