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진보·보수, 30년전 사라진 이념..'디지로그 시대'엔 공생만이 살길"

정혁훈 2021. 1. 3.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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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 지성 이어령 교수에 듣는다
기술·감성 결합한 디지로그가
생명자본주의 시대 핵심동력
정치도 공감·배려로 상생해야
천재 해커가 이끈 대만 방역
신속·공평·즐거움 덕에 성공
AI활용 지력서 뒤진 K방역은
관료 의존탓 '백신후진국' 수모

◆ 2021 신년기획 인터뷰 ◆

이 시대 최고의 지성으로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어령 교수(87)가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 자택에서 이 시대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인공지능(AI)과 디지로그(디지털+아날로그), 생명자본주의에 대해 열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대담 = 민승규 한경대 교수·정혁훈 농업전문기자

"인공지능(AI) 알파고와 이세돌이 바둑 대결을 벌였던 곳인 서울 광화문을 'AI의 성지(聖地)'로 만들었어야 합니다. 그런 상징화도 만들지 못한 채 우물쭈물하는 사이 글로벌 AI 경쟁에서 한국은 뒷전으로 밀렸습니다."

이 시대 최고 지성인 이어령 교수(87)는 역설적이게도 AI가 인간의 지성을 이긴 상징적 사건인 '알파고와 이세돌 간 바둑 대결'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이 교수는 "요즘 우리 정부는 코로나19 백신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해 비판을 받고 있다"며 "독일이 가장 먼저 백신 개발에 나서는 과정에서 AI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인터뷰는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 시절부터 이 교수의 생명자본주의 연구를 지원해 온 민승규 국립한경대 석좌교수(전 농림축산식품부 차관)와 함께 진행했다.

―코로나19가 극성이다. K방역도 결국 뚫리고 말았다. 뭐가 문제였나.

▶ 전 세계에서 코로나19 대응을 가장 잘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대만을 보면 답이 나온다. IQ 180의 천재 소리를 듣는 오드리 탕 디지털 담당 장관(39)이 주도한 방역의 성과는 3F, 즉 Fast(신속) Fair(공평) Fun(즐거움)으로 요약된다. 반강제적 방역이 아닌 국민 참여를 이끌어낸 것이다.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알려지기도 전인 작년 12월에 이미 초기 대응에 들어간 신속성, 그리고 마스크 생산 체제를 하루 200만장에서 10배인 하루 2000만장 체제로 정비해 그것을 누구나 구할 수 있도록 공평하게 배포했다. 또한 전 국민 건강보험 네트워크와 그 빅데이터를 정보통신기술(ICT)과 AI로 처리해 프라이버시와 인권침해 없는 의료서비스를 공평하게 시행했다. 이에 비해 바이러스 만연에 뒷북을 치고 다닌 우리를 비롯한 많은 나라는 3F와는 대조적으로 어두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고난을 겪어야 했다.

―AI와 방역이 어떤 연관이 있나.

▶ AI가 감염자나 발생 지역 등을 관리하고 분석하면 프라이버시 침해와 그 데이터를 다른 목적으로 악용할 수 없게 된다. 특히 요즘 우리 정부가 코로나19 백신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해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지만 가장 빨리 백신을 개발한 독일은 코로나 팬데믹이 일어나기 전 1월부터 개발에 착수했다. 바이러스 지놈 배열이 발표된 지 2주 뒤에 의료기관을 창업한 터키 출신의 부부가 자택 컴퓨터로 백신 설계를 끝내고 화이자와 협력해 가능케 된 것이다. 한마디로 AI 시대에는 산업 시대의 동력이 아니라 지력으로 승부하기 때문에 개인의 창의적 아이디어만 있으면 AI와 결합해 바로 실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출 수 있다는 증거다. 우리나라는 방역의 지력과 통찰력에서 뒤처져 백신 후진국이 되고 만 것이다.

―우리나라도 정보기술 강국인데.

▶ 우리는 하드웨어에서는 세계 최강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21세기 후기정보사회에 들어서면 옛날의 ABC(atom·원자, botanic·식물, chemical·화학)가 새로운 ABC(AI, 빅데이터, 클라우드)로 바뀐다. 우리나라는 이 ABC에서 낙후되기 시작했다. 원격진료에서도 한국은 의료법 등 규제 때문에 세계에서 제일 빠른 초고속 통신망을 두고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대학 등 연구기관이나 한 개인의 슈퍼 파워보다는 주로 관료집단과 정치 권력에 의존해 있기 때문이다. 스웨덴에선 방역 총책임자인 안데르스 테그넬이 연예인급 이상으로 인기가 높다. 방역에 정치를 개입시키거나, 통계 숫자를 속이거나, 법을 훼손하거나, 일상적인 생활 질서를 붕괴시키거나, 일시적인 미봉책과 타협하지 않고 국민이 주체자가 되어 바이러스에 대항했다. 그 결과 4월을 피크로 11월 현재에는 환자 수가 감소해 2차, 3차 감염 없이 한 자릿수의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 우리는 초기의 코로나19 대응에서 국민이 보여준 자율적 참여로 세계의 모범이 되었지만, 관료적으로 멍석을 깔아주면서부터 마스크를 안 쓰면 벌금을 내고 5인 이상 모이면 고발을 하는 등 타율적인 규제가 늘어나 K방역이 퇴색했다.

이어령 교수가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 자택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을 우리가 잘 활용했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 서울 광화문은 촛불혁명만 있었던 게 아니라 AI 혁명도 일어난 곳이다. 포시즌스 호텔이 있는 광화문은 호모사피엔스의 역사상 처음으로 AI 알파고가 이세돌을 꺾어 AI의 메카로 떠오르게 된 곳이다. 하지만 인류의 운명을 바꾼 명소로 관광객들이 찾아왔어야 할 이 장소에는 어떤 기념 표석도 당시의 배너, 바둑판, 바둑알 하나 남아 있지 않다. 구글이 왜 알파고의 역사적 게임을 하필 서울과 이세돌을 택했는가 하는 이유를 깊이 성찰하고 그 특성을 세계에 널리 발신하지 못하면서 AI 경쟁에서 우리가 뒷전으로 밀려났다.

―AI는 디지털의 총아다. 그런데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융합인 '디지로그'를 주창하시는 이유는.

▶ AI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천차만별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컨대 AI 기술을 산업현장인 공장에만 적용한다고 생각해보자. 공장의 생산성이 올라가고 단위시간과 단위비용당 생산량이 늘어날 것이다. 시장에 어마어마한 물량의 제품이 쏟아진다. 동시에 공장 일자리는 계속 줄어든다. 우리 경제가 과잉생산, 과잉공급을 버티지 못할 것이다. AI를 디지털 혁명이라는 관점에서 산업화 개념으로만 이해하면 AI는 오히려 인류에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떤 게 디지로그인가.

▶ 로봇을 예로 생각해보면 쉽다. 로봇은 크게 직립보행형과 캐터필러와 같은 바퀴로 움직인다. 보행은 디지털적이고 무한궤도는 아날로그적이다. 그런데 평지 같은 지형에 따라 바퀴가 편할 때가 있고 반대로 계단처럼 두 발로 오르내리는 보행이 유리한 경우도 있다. 그런데 디지로그는 어느 한쪽이 아니라 모두를 겸하는 양용을 택할 수 있다. 바로 한국의 '뽕도 따고 임도 본다'는 말처럼 '이더 오어(either or)'가 아니라 '보스 앤드(both and)'의 문화다. KAIST에서 일등상을 차지한 로봇이 바로 보행과 바퀴 양용으로 된 디지로그 로봇이었다. 구글이 그동안 만들어온 구글 맵을 다시 지상과 연결해 자율 자동차를 만드는 회사가 된다면 그게 바로 디지로그의 모델이 되는 것이다.

―디지로그가 생명자본주의의 핵심 동력이라고 하셨는데.

▶ 생명체는 물질처럼 정량적인 숫자로 다루기 힘들다. 디지로그는 정량적인 것과 정성적인 것, 즉 양과 질을 결합하는 정신이며 기술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열 길 물속은 디지털로 잴 수 있지만 한 길 사람 속은 아날로그적 직관과 감성으로 잴 수밖에 없다. 생명자본주의는 물질이나 산업기술이 아닌 생명과 사랑, 행복을 원동력으로 하는 자본주의를 말한다. 코로나 팬데믹을 겪고 프랑스의 미래학자이며 경제학자인 자크 아탈리가 '생명경제'라는 저술을 펴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내가 '생명이 자본이다'라는 책을 낼 때 경제학자들은 생명과 경제를 연관 짓는 것을 비판하고 비웃기까지 했다. 그런데 코로나 팬데믹으로 생명의 가치와 그것을 실현하는 디지로그와 생명이 자본이 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로 진보와 보수 간 갈등이 꼽히는데.

▶ 진보와 보수라는 말 자체가 산업사회의 개념이다. 통제경제냐 자유경제냐, 평등이냐 자유냐의 개념을 갖고 싸우는 건데 30년 전에 이미 사라진 논란이다. 우리나라만 지금도 좌우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생명자본주의 시대에는 프랑스혁명 때 이미 제시된 프라테르니테(형제애) 이념을 넘어 바이오필리아(생명애)로 가야 한다. 생명자본이 중시되는 디지로그 시대를 맞이해 정치권도 공감과 배려, 소통을 기반으로 상생과 공생으로 나아가야 한다.


■ 2등 취급받던 농업, AI와 결합하면서 핵심산업으로 우뚝

이어령 교수가 서울 평창동 영인문학관 자택에서 생명자본주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디지로그 시대를 대표하는 산업으로 농업을 꼽으셨는데.

▶ 전쟁이나 코로나19처럼 생명의 위기에서 인간이 제일 먼저 취해야 하는 것은 먹거리를 구하고 보존하는 일이다.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라는 것은 실리콘밸리가 아니라 자급자족할 수 있는 농업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AI가 활약하는 분야가 바로 의료기관이라는 것을 보더라도 생명과 직결된 분야로 농업과 의료 그리고 교육과 엔터테인먼트 등 산업주의 시대에서는 뒷전에 있던 것들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존 러스킨이 말하는 내재적 가치가 최우선하는 경제다.

―작년 세계농업AI대회에서 3위를 한 한국팀 이름을 디지로그로 지어주셨는데.

▶ IT를 농업에 이용하는 것 자체가 디지털의 사이버 공간과 아날로그인 흙의 공간이 융합하는 디지로그 모델이다. 당시 한국팀 청년들에게 생명애(바이오필리아)로서 토마토를 재배한 예를 보여주었다. AI에는 바이오필리아 같은 애정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팀이 해외 디지털 기업 참가팀을 제치고 우수한 성적을 거둔 것은 집 안에서 콩나물을 기르고, 지붕에 박을 키워 올리고, 논두렁에 콩을 심는 한국 특유의 농업 기술과 첨단 기술을 융합하는 디지로그 원형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디지로그 이론을 현실에서 입증해준 젊은이들이 너무 자랑스럽다.

―올해는 소의 해다. 젊은 사람들에게 한말씀해 주신다면.

▶ 올여름 장마와 태풍으로 물난리가 났을 때 200리까지 떠내려간 소가 살아서 발견된 일이 있었다. 만약 떠내려간 동물이 말이었다면 물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치다가 힘이 빠져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는 자신의 몸을 물에 맡긴 채 끈기 있게 버티다가 생존에 성공했다. 이처럼 코로나19라는 엄혹한 상황에서의 몸부림은 힘만 빠질 뿐이다. 지금은 큰 물결에 몸을 맡긴 채 참고 기다리면서 힘을 비축하고 내공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 이어령 교수는…

△1934년 충남 아산 출생 △서울대 국문학과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화여대 교수 △서울올림픽 개·폐막식 총괄기획 △초대 문화부 장관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이사장 △이화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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