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정가제가 불공정하다는 착각

박성경 2021. 1. 2.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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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9월24일 도서정가제 사수를 위한 출판·문화계 공동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2002년 6월4일 저녁, 부산 월드컵경기장에서는 커다란 함성이 울렸다. 대한민국이 폴란드를 상대로 첫 승을 올리는 쾌거를 이뤘기 때문이다. 환희의 함성이 울려 퍼지던 그 시각, 서울 광화문과 시청에서 멀지 않은 종로 한편에서는 다른 사건이 벌어졌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인 종로서적이 부도를 내고 문을 닫고 만 것이다. 1907년 개업해 10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던 종로서적의 부도는 출판·서점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사건이 터진 2000년대 초반은 독서 인구가 감소하고, 1990년대 중후반 등장한 인터넷서점이 막대한 광고 공세를 펼치며 50%에 가까운 할인을 내세워 경쟁에 나선 시기다. 당시 주요 인터넷서점의 할인판매는 시장지배력 확대와 회원 확보를 위한 출혈경쟁이었으나, 이로 인해 전통적인 서점과 출판사는 ‘막대한 이익을 남겨온 장사치’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됐다. 그러나 출판사들은 급속히 몸집을 키우는 인터넷서점에 책을 공급하기 위해 출혈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큰 폭의 할인을 감당하기 위해 책값을 비싸게 매긴 뒤 할인하는 일이 만연했다. 결국 할인을 할 여력이 없는 지역 서점은 경쟁력을 상실해 무너졌고, 출판사들의 이익도 크게 감소하기 시작했다. 도서정가제 논의는 이런 상황에서 촉발된 것이다.

도서정가제라는 개념이 처음 법률에 반영된 것은 2003년이다. 이후 2014년에는 온·오프라인 서점, 신간·구간 구분 없이 동일하게 할인하는 현재의 도서정가제가 담긴 ‘출판문화산업진흥법’이 제정되어 오늘까지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출판문화산업진흥법에서 도서정가제 관련 조항은 3년마다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검토 조치를 하게 되어 있어 3년마다 논란을 낳고 있다. 2017년에는 2014년의 틀을 유지하는 것으로 출판·서점계와 소비자단체, 정부가 합의했다. 그리고 다시 3년째인 2020년, 2019년부터 민관이 모여 1년 동안 협의를 했고, 기존 틀을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지난 7월 말, 정부가 갑자기 합의안을 파기한다고 출판·서점계에 통보했다. 출판·서점계와 작가들, 독서단체 등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청와대와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100일 넘게 이어갔고, 36개에 이르는 출판·서점계, 독서계, 도서관계에서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도서정가제의 필요성을 알리는 노력을 경주했다. 결국 정부가 현행 틀을 유지하는 것으로 물러서면서 논란은 일단락이 되었다.

일각에서는 책도 상품이므로 자유롭게 할인하여 판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유롭게 할인 판매를 하면 책값은 싸질까? 그렇다면 지금 책은 비싼 것일까? 출판사와 서점은 ‘여력’이 있는데도 폭리를 취하는 것일까?

출판계는 한국의 책값이 OECD 가입 국가들과 비교할 때 무척 싸다고 이야기한다. 최근 베스트셀러가 된 마이클 샌델의 신간 〈공정하다는 착각〉의 예를 보자. 국내 서점 대부분은 정가 1만8000원인 이 책을 10% 할인하여 판매가 1만6200원에 마일리지 900원을 더 주는 방식으로 판매한다. 미국 아마존에서는 28달러(약 3만원)의 책을 18달러(약 1만9500원)에 판매하고 있다. 한글 번역판은 번역비가 추가돼 제작비용은 더 드는 데다 영미권 출판 시장은 한국어 시장과 비교할 수 없이 크지만, 책값은 미국에서 출간된 원서보다 한국어판이 싸다.

도서정가제가 정착된 후 생긴 일들

인상률이 문제일까? 물가상승률과 비교해보자. 2000년 서울시 버스와 지하철 요금은 500원, 2020년 말인 지금은 1250원이며 추가 인상을 논의 중이다. 한 메이저 문학출판사에서 2000년에 발행한 시집은 5000원이었는데, 현재 이 출판사 시집 한 권은 9000원께다.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하며 강력하게 통제하는 공공교통요금보다 덜 오른 것이 책값이다.

책값을 유지하기 위해 출판·서점계는 저임금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른 산업과 출판·서점계 노동자의 임금을 비교하는 것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저렴한 책값은 저자의 인세에도 영향을 미친다. 보통 저자들은 정가의 5~10% 정도의 인세를 받는다. 현재 출판 시장은 초판 2000부를 발행하기도 버거운 실정이다. 저자는 그간 쌓아온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1년 내외의 시간을 들여 책을 써낸다. 그 대가는 고작 200만~300만원에 불과하다. 작가의 창작 의욕이 사라지고 더 이상 출판·서점계에서 아무도 일하고 싶어지지 않는다면 결국 독자는 읽을 책을 잃는 셈이다.

한국은 출판의 공공성을 드러내는 제도를 여럿 시행하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책을 의무적으로 보내는 ‘납본제도’가 일례다. ‘출간되는 책 대부분은 보존 가치가 있다’는 전제에서 만든 제도다. 도서관은 어떤가? 시민이라면 누구나 무료로 책을 빌려볼 수 있도록 운영하는 제도다. 출판계는, 더 많은 시민이 책에 접근할 권리를 갖는 방법은 책값을 할인하는 것이 아니라 도서관을 확충하고 제도를 개선하는 것이라 믿는다.

출판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종종 출판이 사양산업이라고 자조적으로 이야기한다. 새로운 매체의 등장으로 인해 책을 읽는 사람은 더 줄어들 것이다. 이런 악조건에서도 2014년 4만7226개이던 출판사는 2019년 7만135개로 늘었고, 신간 발행종수는 2014년 4만7589종에서 2019년 6만5432종으로 늘었다. 급격히 줄어들던 동네서점의 폐업률도 주춤하고 있고 독립서점은 오히려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최근 출판과 책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도 있지만 도서정가제라는 작은 제도가 정착했기 때문에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우리 시대의 가치를 담는 책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도서정가제를 이해해주십사 독자들께 부탁드린다.

박성경 (도서출판 따비 대표)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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