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듣고 쓰며 사랑을 배우는 작가

이상원 기자 2021. 1. 2.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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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윤무영출판인이 꼽은 올해의 저자인 홍은전 작가.

인터뷰 도중 홍은전 작가는 종종 말을 멈췄다. 짧게는 5초, 어떤 때는 10초 이상 가만히 단어를 고른 뒤에야 입을 열었다. 자신이 겪은 세계관 전복을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를 올해의 저자로 꼽은 출판인들은 이 ‘신중함’과 ‘치열함’, ‘묵직함’이 마음을 울렸다고 했다.

올해 홍 작가가 낸 책은 〈그냥, 사람〉. 2015년부터 지난 9월까지 쓴 신문 칼럼을 모아서 펴냈다. 그의 글과 삶 모두 호평을 받았다. 출판인들은 홍은전 작가를 두고 “삶을 진하게 관통하는 글맛” “글을 잘 쓴다는 것은 그저 삶을 살아가는 태도에 다름 아님을 일깨워줬다”와 같은 평을 냈다. 올해의 책으로 〈그냥, 사람〉을 꼽은 이는 “관찰과 참여의 경계를 넘나들며 현실을 고발하는 책”이라고 평했다.

홍은전 작가는 작가라는 정체성이 어색하다고 했다. 그는 2001년부터 13년간 노들장애인야간학교에서 교사·활동가로 일했다. 야학에 찾아간 것은 사범대 4학년 여름. “임용시험 준비를 하려고 했는데 공부가 시동이 잘 안 걸렸다. 1년 정도 숨통 트이는 곳에 가보자는 마음으로 야학을 찾아 나섰다. 노들야학 홈페이지를 보니 고민을 하고, 문제의식을 지닌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야학에서 그는 세계관이 뒤집혔다고 말했다. “천사들을 만날 줄 알고 갔는데 정작 만난 사람들은 게릴라들이었다(웃음).”

노들야학에 가기 전 그는 막연히 ‘장애인은 착하기만 한 사람들’이라는 편견이 있었다고 했다. 미디어에 등장하는 장애인은 대개 불쌍하고 비극적인, 비장애인과는 전혀 다른 어떤 존재로 묘사된다. 하지만 노들야학에서 만난 장애인들은 짜증을 내고, 욕망을 말하며, 거리에서 데모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홍 작가는 “무의식중에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다르게 살아. 그렇게 살아도 돼’라고 생각했던 내 머릿속에 새로운 세계관이 쏟아지듯 들어왔다”라고 말했다. “대학에 가고 싶고, 연애하고 싶고, 부모에게서 독립하고 싶고, 돈을 벌고 싶은” 제각기 다른 인간 군상을 만나자 관점이 뒤바뀌었다. ‘불쌍한 장애인은 비장애인의 도움을 받아 사회에 적응해야 한다’는 관념 대신 ‘사회가 잘못됐다. 장애인은 사회에 평등을 요구하고, 저항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야학에 가지 말고 임용시험을 보라는 가족에게 그는 “장애인이 얼마나 힘들게 사는 줄 알아요?”라고 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들이 힘들기 때문에 야학에 간 게 아니었다. 매일 만나는 새로운 경험이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차츰 쌓여가는 앎도 있지만, 그동안 가졌던 생각이 무너져 내리는 앎도 있다. ‘내가 알던 건 전부 거짓말이었다’는 걸 깨닫는 과정이 경이롭고 행복했다.” 하지만 공동체 생활의 스트레스도 적지 않았다. 기쁜 일도, 힘든 일도 너무 많았다. 결국 2014년 노들야학을 떠났다. 남들은 13년이 긴 시간이라고 했지만, 평생 이곳에 몸담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홍 작가는 죄책감이 남았다고 말한다.

‘남의 말에 한 단락도 양보할 수 없다’는 원칙

신문 칼럼에 들어가는 ‘인권기록 활동가’라는 호칭은 노들야학을 나와 2014년 ‘4·16세월호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에서 활동하며 얻었다. 2015년 초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펴냈다. 형제복지원 구술 프로젝트, 선감학원 피해 생존자 구술 기록 등에도 참여했다. 고통을 듣고 쓰는 작업이 괴롭지 않은지 묻자 홍은전 작가는 “오히려 힘이 난다”라고 답했다. 참사 피해자들의 이야기가 고통만 가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랑 이야기가 더 크다. 아주 사랑했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다. (피해자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야기를 듣고, 배우고, 내가 변하는 과정이 좋다.”

홍 작가는 평소 책을 많이 읽지 않는다. 고통과 사랑을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읽고 싶은 책’이라고 했다.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그의 삶을 쓰는 칼럼에서는 다른 책의 문장이나 통계를 인용하지 않으려 한다. “화상을 입은 장애인 통계를 적고 ‘사회시스템이 취약하다’, 이런 식으로 쓰지 않는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그런 얘기를 하지 않는다. 어떨 때 괴롭고 상처받았는지, 힘이 났는지 말한다. ‘남의 말에 한 단락도 양보할 수 없다’는 원칙이 있다.”

최근 홍은전 작가는 두 번째 세계관 전복을 겪었다. 고양이를 키우면서다. 장애인이 일상에서 겪는 배제와 격리를 야학에 가서야 체감했듯, 일상에 걸어 들어온 이 생명체와 조우하며 ‘동물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동물해방운동단체를 찾아가 도살장에 가는 체험을 했다. 살아 있는 소와 돼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걸 그제야 깨닫게 됐다. “그들을 마주치는 순간 미안해졌다. 동물의 구체적 삶을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비유로 갖다 쓰고, 함부로 추상화해왔다.”

어떤 앎은 말을 교정한다. 홍 작가는 누군가 장애인을 비하하는 발언을 들으면 ‘저 사람은 장애인 친구가 없구나’라고 생각해왔다. 살아 있는 동물에 대해 알아갈수록 동물을 욕으로 쓰지 못하게 됐다. 정육점에서 노래를 부르고 도살장 문을 가로막는 동물권 운동가들을 지켜보며 그는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떠올렸다. 그러나 장애인 운동을 하며 외친 ‘우리는 동물이 아니다’라는 말도 다시 생각하게 됐다. 한편으로는 비장애인인 자신이 이런 구호를 반성해도 되는지 궁리한다.

홍은전 작가는 언젠가 동물에 대한 책을 쓸 예정이다. 여태 그래왔듯 삶의 와중에 겪은 일들에서 힌트를 찾을 생각이다. 동물해방운동이라는 “다른 세계로 넘어간 이후 하루하루 변해간 기쁜 과정”을 타인과 공유하고 싶다고 했다. 어떤 책과 영상을 봤는지, 누구의 어떤 말을 들었는지, 어떤 음식을 끊기가 어려웠는지 등을 찬찬히 복기하는 글을 쓰려고 한다. 한 출판인은 홍은전 작가에 대해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질 저자”라고 적었다. 그의 목소리가 “귀하다”고, “필요하다”고 쓴 이들도 있었다.

이상원 기자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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