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달호의 오늘도, 편의점] 탕자처럼 돌아오라, 희망이여

봉달호 작가·'매일 갑니다, 편의점' 저자 2021. 1. 2. 03:06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주말]

새해가 되면 사라지는 손님들이 있다. 분명 하루에 한두 번, 혹은 서너 번, 편의점 문턱이 닿도록 오가던 손님인데 정초에 발길을 뚝 끊는다. 그러나 너무 상심하거나 속을 태울 필요까진 없을지니, 빠르면 사나흘, 길어야 한두 달, 뒤통수를 긁적이며 다시 나타날 손님들이다. 쑥스러운 목소리로 담뱃진열장을 가리키며 “저기… 제가 피우던 그것 주세요”라고 말끝을 흐릴 것이다. 돌아오셨군요, 편의점의 탕자여.

일러스트=안병현

물론 손님의 건강을 위해, 거창하게는 국민 보건 정책상, 담배는 되도록 끊는 것이 좋다. 단골손님에게 “에고, 너무 많이 피우신다. 좀 줄여보는 게 어때요?” 스스로 금연 홍보대사가 되어 권하기도 한다. 그러나 담배가 매출의 절반을 차지하는 편의점 주인장 입장에서 보자면, 생계의 반쪽을 가로 5.5cm × 세로 8.8cm짜리 작은 갑(匣)에 의존해 살아가는 신세로서 말하자면, 1월은 살짝 아쉬운 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반짝 금연 결심이 느는 계절이다. 그래도 역시 크게 괘념치는 않는다. 뭐 어때, 이것 아니면 저것 팔면 되지. 담배 대신 껌과 사탕은 팔릴 것이고, 더욱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으니, 그 결심은 대부분 돌아설 테니까.

9년째 같은 자리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다 보니 매년 회전목마처럼 돌아가는 풍경을 발견한다. 새해가 되면 달달한 디저트 상품류 매출도 살짝 줄어드는 것이 보인다. 폭신폭신한 카스텔라에 생크림이 듬뿍 들어간 모찌롤을 하루에 하나씩 사가던 빨간구두 손님도 정초에는 매정히 발길을 끊는다. “오늘은 왜 안 사?”라는 쇼핑 동료의 물음에 “올해는 다이어트 성공해야지”라며 각오의 눈망울을 반짝인다. 이 또한 절절히 슬퍼하거나 걱정할 필요는 없을지니, 보름 혹은 한 달, 아주 길어야 석 달, 빨간구두는 다시 찾아올 것이다. ‘이렇게 맛있는 녀석을 내가 왜 외면했던 거지? 미안해!’ 하는 표정으로 더욱 맹렬히 모찌롤을 찾을 것이다. 뒤늦게라도 반성(?)하는 당신을 환영합니다. 어서 오세요, 편의점의 탕자여.

그러잖아도 편의점 매출은 여름보다 겨울에 뚜둑 떨어지는데, 1월에는 ‘새해의 결심’이라는 오래된 저격수까지 만나 최악의 매출을 맞는다. 설상가상 올해는 코로나19까지 덮쳐와, “도대체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야속한 하늘만 우러르는 하루하루다. 이 고비만 넘으면 됩니다, 드디어 기나긴 터널의 끝이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식의 희망 고문을 몇 차례 겪다 보니 이제는 ‘희망’이란 낱말조차 진부하게 다가온다. 과연 저 언덕이 마지막일까, 겨울 뒤에 봄이 있긴 있는 것일까, 의심하고 좌절한다. 내가 지나치게 삐딱하고 고루한 걸까.

5, 4, 3, 2, 1! 댕, 댕, 댕…. 해마다 제야의 종소리 들으며 새해를 맞았는데 올해는 그것마저 코로나에 빼앗긴 시절. 새해가 새것 같지 않다. 친구네 편의점에 나란히 앉아 씁쓸한 세모(歲暮)의 밤을 함께 지켜주고 있으려니 자정이 지나자마자 패딩점퍼 손님 두 명이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온다.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꺼내 계산대 위에 올려놓는다. “담배도 하나 주세요.” “신분증 보여주시겠어요?” 그 말이 나오기만 기다렸다는 듯 불쑥 들이민 주민등록증을 확인하니 2002년 8월 30일생. 오호라, 성인이 된 지 그새 2분 51초 지났단 말이지. 그러고 보니 2002년생이 벌써 성인이 됐구나!

온 국민이 붉은 티셔츠 맞춰 입고 응원막대 두드리며 “짝짝짝짝짝, 대~한민국” 외치던 것이 어제 일처럼 또렷한데 어느덧 20년이 흘렀단 말이지. 만삭의 몸으로 손뼉 치고 응원하는 엄마 뱃속에서 꼼지락거리며 손가락이나 빨고 있던 녀석들이 이제는 편의점에서 술 담배를 살 수 있는 나이가 되었구나. 어쨌든 시간만큼은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던 것이고, 우리는 또다시 새로운 한 해의 출발선에 공평하게 서 있다.

바라건대 2021년에는 도망간 희망이 돌아왔으면 좋겠다. 내가 뭘 섭섭하게 했던 것도 아닐진대 홀연 떠나버린 녀석이, 탕자처럼 불쑥 예고 없이 찾아와도 좋으니, 부디 돌아오길 희망한다. 담배 손님은 다시 돌아오지 않아도 좋고, 다이어트에 단단히 각오를 세운 손님은 줄곧 모찌롤을 외면해도 좋으니, 2002년생이 어느새 어른이 되어 술 담배를 사러 오는 시간의 순리처럼 세상 모든 희망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새해였으면 좋겠다. 희망에 희망을 얹어 희망을 희망하는 오늘 아침, 첫 태양을 편의점에서 맞는다. 해피뉴이어! 新年快樂(신년쾌락)!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