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특파원이 쓴 '한국 아버지' 이중섭, 일본 평단을 달구다

김미리 기자 2021. 1. 2.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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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이중섭 소재로 최고 저술상 수상
오누키 전 마이니치 특파원
오누키 전 마이니치 신문 서울 특파원이 이중섭을 소재로 쓴 책 '돌아오지 않는 강'을 들고 있다. 뒤로 한국에서 모은 이중섭 관련 책과 각종 자료가 보인다. /오누키 제공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이 몇 년 새 ‘멀고도 먼 나라’가 됐다. 한일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고, 코로나까지 덮쳐 두 나라를 잇는 물리적·심리적 통로가 꽉 막혀 있다.

얼어붙은 양국 사이, 최근 작지만 의미 있는 훈풍 하나가 불어왔다. 지난달 일본에서 권위 있는 저술상 중 하나로 꼽히는 ‘쇼가쿠칸(小學館) 논픽션 대상’에 한국 화가 이중섭(1916~1956)을 다룬 작품이 선정됐다는 소식이다. 책 제목은 ‘돌아오지 않는 강’. 2013~2018년 서울 특파원을 지낸 일본 마이니치신문 오누키 도모코(大貫智子·46) 기자가 쓴 작품이다.

슈에이샤(集英社), 고단샤(講談社)와 함께 일본 3대 출판사로 꼽히는 쇼가쿠칸에서 1993년 상을 제정한 이래 한국 관련 책이 대상을 탄 건 처음이다. 도쿄에 있는 저자를 화상앱 ‘줌’으로 만났다.

◇정치부 기자, 이중섭에 꽂히다

—서울 특파원 출신 일본 기자 대부분이 한반도 정세를 다룬 책을 내던데요. 특이하게 이중섭을 소재로 책을 냈네요.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린 ‘이중섭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취재한 적이 있어요. 전공(와세다대 정치경제학부)도 아니고 신문사에서도 주로 정치부에만 있어 그림엔 문외한이었어요. 우연히 한국 신문을 보다가 이중섭이라는 요절 화가가 있는데 일본 부인을 뒀다는 구절을 읽곤 호기심이 발동했죠. 일에 지쳐 있을 때라 기분 전환도 필요했고요.”

—지쳐 있었다니요?

“2016년이 참 드라마틱한 해였어요. 2013년 서울에 부임한 이후 위안부 합의, 북핵 문제 등 바람 잘 날이 없었죠. 보통 임기가 3년이라 돌아갈 타이밍이었는데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슈가 터지며 갑자기 더 머물게 됐어요. 촛불 집회를 취재하면서 교수, 고위 공무원 등 전문가를 만났는데 그들 예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사태가 전개됐어요. 4년이나 있었는데 내가 한정된 부류만 만났구나, 한국은 평범한 사람을 만나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나라라는 걸 깨달았어요. 자연스럽게 문화에도 관심을 갖게 됐지요.”

—일본에선 이중섭이 전혀 안 알려졌나요?

“일본의 수많은 한일 관계 전문가 중 이중섭을 아는 사람은 거의 못 봤어요. 한국에선 ‘국민 화가’라 불리는 작가인데 말이죠. 남성적 시각에서 거대한 정치·외교 문제만 다뤘지, 문화처럼 일상과 가까운 얘기는 안중에도 없었던 게 아닌가 해요. 저 역시 ‘특종병’ 걸린 정치부 기자로서 살아 있는 사람들 이야기에 무심했고요.”

마침 덕수궁 미술관은 광화문에 있는 지국 사무실에서 500m 거리였다. 한달음에 달려간 전시장은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대표작 ‘황소’, 은지화(銀紙畵·담뱃갑 은박지에 그린 그림) 앞에 관객이 몰려 있었지만, 그의 눈을 사로잡은 건 이중섭이 일본으로 돌아간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한국명 이남덕·100) 여사와 두 아들에게 일본어로 써서 보낸 그림엽서였다. “한국 관객들은 한국말로 번역한 설명을 보는데 저는 원본 그대로 읽으니 신기했어요. 원어민 눈에만 보이는 디테일도 있었고요.”

—어색한 부분이 있었나요?

“이중섭이 일본 유학파인데도 살짝 어색한 부분이 보였어요. 예컨대 ‘보고 싶다’는 표현을 일본 사람은 ‘会いたい(아이타이·만나고 싶다)’라고 하는데 ‘見たい(미타이)’라고 했더라고요. 한국말을 그대로 직역한 거죠. 저도 한국어를 하면서 뉘앙스를 완벽히 전달하지 못해 답답함을 종종 느끼던 차라 이중섭 마음을 알 것 같았어요. 언어 장벽을 넘어 가족에게 그리운 마음을 전하려고 애쓰는 ‘아빠’ 이중섭의 모습을 떠올리니 가슴이 찡했어요. 이런 이야기를 일본 독자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2016년 11월 6일 자 마이니치신문 1면에 이중섭 전시 기사가 등장했다. 바로 위 1면 톱기사는 탄핵 촛불 집회였다. 전혀 다른 주제로 그가 쓴 서울발 기사 두 건이 1면에 나란히 실렸다.

기사를 보고 쇼가쿠칸의 한 편집자가 책을 내고 싶다고 연락을 했다. “쇼가쿠칸에서 발행하는 우익 성향 잡지 ‘사피오’에서 일했던 30대 중반 젊은 편집자였어요. 혐한(嫌韓) 글을 담당하며 회의를 느꼈다면서 한일 간 따뜻한 사람 스토리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싶다고 하더군요. 책 출간이 4년가량 늦어졌는데도 묵묵히 기다려줬어요.”

◇이중섭 사후, 아내의 60여년

책 제목은 1956년 이중섭이 세상을 뜨던 해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 ‘돌아오지 않는 강’에서 따왔다. 지친 소년이 힘없이 창밖을 내다보고 저 멀리 머리에 광주리를 인 어머니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는 그림이다.

이중섭이 1956년 죽기 전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 '돌아오지 않는 강' /국립현대미술관

—일본인 관점에서 신경 쓴 부분이 있는지요.

“특파원으로 부임했을 때 혼자 네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갔어요. 일본에선 매우 드문 ‘워킹맘 특파원’이었죠. 전 세계에 파견된 일본 매체 특파원 중 그 또래 아이를 현지에 데려가는 여자 특파원은 거의 없어요. ‘엄마’ 입장에서 보니 남편을 떠나보내고 60년 넘게 홀로 두 아이를 키워낸 이중섭 부인의 삶이 어땠을지 궁금해졌어요.”

한국엔 잘 안 알려진 이중섭 사후 ‘야마모토 여사의 60여 년’을 많이 담았다.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들은 날 어린 아이들에게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차마 못 하고 눈물 삼키며 재봉틀을 돌렸던 이야기, 교회 목사용 가운을 디자인해 생계를 이어간 이야기 등을 들려준다.

—심사평에 “치열한 취재를 바탕으로 한반도와 일본이 얽힌 격랑의 역사를 현장감 있게 다룬 작품”이라고 돼 있더군요.

“4년간 도쿄, 부산, 제주, 통영 등 이중섭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현장을 취재했어요. 도쿄에 사는 야마모토 여사와 둘째 아들 야스나리(한국명 이태성), 서울에 있는 이중섭 장조카 이영진씨 가족도 몇 차례 만났고요. 그러고 보니 이중섭과 인연 있는 함경도 원산에 간 적도 있네요.”

이중섭과 야마모토 여사는 해방 직전인 1945년 봄 결혼한 뒤 6·25가 터진 1950년 겨울 남쪽으로 피란 가기 전까지 원산에서 살았다.

—두 분은 평생 그리워하다 못 돌아간 곳을 당신은 가 봤네요.

“두 차례 방북했어요. 2012년 일본인 유골이 발견돼 취재차 원산, 함흥, 청진을 다녀왔어요. 2016년엔 평양을 취재했고요. 일본에선 북한은 사람 살 데가 못 되는 곳이라고 생각하는데 야마모토 여사 기억 속 원산은 평화로운 곳이었어요. 시어머니가 집도 마련해 주고 해방 후 소련군이 들어왔을 때도 큰 문제가 없었다고 해요. 그저 6·25만 일어나지 않았다면 행복했을 거라고. 책을 쓰는 동안 원산에서 사온 지도를 펼쳐 보며 그 모습을 떠올리곤 했지요.”

—아내가 고령인데 기억을 하던가요.

“백세(百歲)라 모든 것에 초연한데 남편 얘기만 나오면 소녀처럼 수줍어했어요. 문화학원(예술학교)에서 처음 만난 날, 팔짱 끼고 돌아다니다가 엄마 친구한테 걸렸던 날 등 80년 전쯤 얘기를 엊그제처럼 생생하게 떠올렸죠. 이중섭의 삶이 안타깝다는데 평생 그만을 생각하는 사랑을 만났다는 점에선 행복한 사람 아닐까 싶어요.” 야마모토 여사는 4년 전 큰아들(야스카타·한국명 이태현)이 세상을 뜬 뒤 부쩍 건강이 안 좋아졌다. 최근엔 위암 판정을 받아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한다.

지난 2019년 오누키 기자가 이중섭 부인 야마모토 여사와 둘째 아들 야스나리씨를 만났을 때. / 오누키 제공

◇斷交 때도 우정은 흘렀다

—책을 쓰면서 새롭게 안 사실도 있나요?

“둘째 아드님이 제가 한국에서 돌아오자마자 미공개 편지를 보여줬어요. 이중섭 친구 10여 명이 야마모토 여사에게 보낸 안부 편지였어요. 1년 전쯤엔 집을 치우다가 아버지가 보낸 편지 뭉치를 발견했다고 연락을 했고요.”

그중엔 김환기 화백의 아내인 김향안 여사가 보낸 편지도 있었다.

“‘떨어져 있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이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선택을 해도 이해한다'면서 같은 여자 입장에서 진심으로 걱정하는 내용이었어요. 국교 정상화 이전이니 지금보다 한일 관계가 훨씬 험난했을 때였지만 우정은 끈끈하게 이어져 있었어요.”

—한일 관계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데 이중섭 이야기가 귀감이 될 수도 있겠어요.

“일본에서 지난해 한국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어요. ’82년생 김지영'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등 한국 젊은 여성 작가가 쓴 책도 화제를 모았고요. 정부 차원에선 냉랭하지만 민간 차원의 문화 공감대는 더 커졌어요. 이중섭 이야기가 한일의 국경을 초월한 순수한 사랑과 우정을 알리는 계기가 됐으면 해요.”

책은 올해 4월 출간 예정이다. 한국 출간도 계획하고 있다. “아들 리쿠가 네 살부터 아홉 살까지 서울에서 살았어요. 제일 좋아하는 장난감은 한국 장난감 터닝 메카드. 한국에서 책이 발간될 때쯤이면 코로나도 사라지고 한일 관계도 좋아져 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서울 창신동 문구 시장에 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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