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 코리아] 어느 ‘대깨문’의 일기

최규민 디지털724팀 차장 2021. 1. 2. 03:0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언론사에 의해 수정되어 본문과 댓글 내용이 다를 수 있습니다.

‘환상의 콤비’가 될 수 있었던 문 대통령과 열성 지지자들
맹목적 지지와 거듭된 실정이 서로를 해치고 말았다

문재인 대통령 극성 지지자를 뜻하는 ‘문빠’ 혹은 ‘대깨문’은 이 정권 내내 많은 이들에게 공포 혹은 혐오의 대상이었다.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경쟁을 더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양념”이라는 ‘인증서’를 받은 후 이들은 현실 세계와 온라인을 가리지 않고 집단으로 몰려다니며 ‘양념질’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0월 2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20201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마친 후 지지자들의 환호를 받으며 국회를 나서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대통령과 정권에 대한 찬양을 강요하고,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에겐 테러를 일삼았다. 어느 반찬 가게 주인은 대통령에게 “경기가 거지 같다”고 한마디 했다가 마녀사냥을 당했다. 한 친정부 성향 잡지 편집장은 페이스북에 “덤벼라, 문빠들”이라고 썼다가 불매운동을 맞고 “노여움을 거둬달라”고 백기 투항한 뒤 회사를 떠났다. 잡지 표지에 실린 대통령 사진이 지지자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고작 그런 이유였다. 정부에 우호적이지 않은 보고서를 냈다가 집단 린치에 시달린 한 국책연구소 연구원은 “몇 달간 불면증에 시달렸다”고 토로했다. 온라인에서도 지지자들은 각종 커뮤니티 사이트와 맘카페 등을 장악한 채 기사 댓글에 좌표를 찍어 추천 수를 조작하거나 SNS로 몰려가 무더기로 악플을 달았다. 그들 스스로는 대통령의 든든한 우군이자 ‘깨시민’이라고 여겼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들에게서 광신도 혹은 홍위병의 광기를 봤다.

대통령의 임기가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하늘을 찌를 듯하던 ‘대깨문’의 위세도 예전만 못해졌다. 전·현직 민주당 의원들이 추미애 법무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 갈등에서 윤 총장 편에 섰고, 최장집·강준만·홍세화 등 진보계 원로들은 집권 세력을 향해 전체주의를 추구하는 싸가지 없는 ‘민주건달'들이라고 쏘아붙였다. 민주당 2중대로 불렸던 정의당조차 공수처법과 가덕도 신공항에 대해 “명분도 실리도 없다”고 비판했다. 다들 ‘대깨문’ 눈치 보느라 숨죽였던 정권 초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들이다.

상황이 이렇게 된 건 결국 이 정부의 거듭된 실정(失政) 때문일 것이다. 소득 주도 성장, 탈원전, 일자리, 저출산, 남북 관계, 검찰 개혁, 사회 통합, 방역 등 어느 하나 제대로 한 게 없다 보니 지지자들조차 이 정부의 업적이라고 내세울 만한 걸 마땅히 찾지 못한다. 하다 못해 집권 4년이 다 되도록 ‘세월호의 진실’조차 인양되지 않았다. 부동산 정책 실패는 너무나 처참해 웬만한 지지자뿐 아니라 대통령 본인조차 입을 닫았다.

그래서 지지자들은 현실과 온라인 세상에서 점점 비웃음거리로 전락하고 있다. 서울의 한 대기업에 다니는 지인은 “임기 초에는 문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았지만, 요즘엔 아직도 대통령을 지지한다고 하면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는다”고 했다. 한때 대통령 찬양으로 가득했던 여러 사이트에는 대통령과 지지자들에 대한 비난과 조롱이 넘쳐난다. 지지자들 스스로 만들어 자랑스럽게 사용했던 ‘대깨문’이라는 용어는 이제 멸칭이 됐다.

강력한 지지 기반은 언제나 정치인에게 최고의 자산이고, 문 대통령과 지지자들은 ‘환상의 콤비’처럼 여러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통령은 맹목적인 지지자들에게 취해 잘못된 길만 골라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고, 지지자들은 대통령만 믿고 있다 정말로 머리가 깨질 처지가 됐다. 얼마 전 누가 보내준 ‘대깨문의 일기’는 이렇다. “서울 서대문구에서 전세를 살던 대깨문 김모씨는 종부세 인상 뉴스에 투기꾼 놈들 잘됐다며 박장대소를 했다. 5개월 후 전셋집 재계약 날 월세 200만원을 내라는 집주인 말에 영문도 모르고 경기도로 쫓겨나게 됐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빨간 버스를 타고 출근하는 그의 이어폰에선 김어준의 뉴스공장이 흐르고 있다.” 너무 현실적이라 더 안타깝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