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레터] 첫 마음

곽아람 Books 팀장 2021. 1. 2. 03:0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정채봉 산문집 '첫 마음'

“1월 1일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면서 먹은 첫 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언제든지 늘 새 마음이기 때문에 바다로 향하는 냇물처럼 날마다 새로우며, 깊어지며, 넓어진다.”

9일이 20주기인 동화작가 정채봉(1946~2001) 산문집 ‘첫 마음’(샘터) 앞머리에 적힌 문장입니다. 그의 시 ‘첫 마음’ 중 한 구절을 뽑아 발문(跋文)으로 삼았답니다.

인물 정보 데이터베이스에 ‘정채봉’을 검색하니 좌우명란에 ‘복(福)을 아낄 것’이라 적혀 있습니다. 출판 편집자의 세계를 그린 일본 만화 ‘중쇄를 찍자!’가 떠오릅니다. 만화에 나오는 출판사 사장은 거액의 복권에 당첨되지만, 책이 팔리는 데 쓰일 운이 다할까 봐 복권을 염소에게 먹여버리죠. 그는 젊은 시절 노름에 빠져 방탕하게 지냈는데 동네 노인에게 강도짓 하려다 이런 말을 듣습니다. “나를 죽이면 네 운은 끝이다. 운이란 거는 좋은 일 하면 모이고 나쁜 짓 하면 금세 줄어든다. 평생 이기기만 하는 노름은 없다. 세상이란 더하고 빼면 남는 게 없는 법이다. 문제는 ‘어디서 이기고 싶은가?’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한번 생각해 봐라. 토악질할 정도로 생각해서 선택해라. 운을 잘 써야 해.”

곽아람·Books 팀장

마음이 움직여 고향을 떠난 그는 갖은 일을 전전하다 출판사에 취직합니다. 그 출판사가 펴낸 미야자와 겐지 시집을 읽다가 ‘그저 글씨가 늘어서 있을 뿐인데’ 울음이 터졌기 때문이죠. 이후에도 노름을 했지만 큰 화재로 가족을 잃을 뻔한 날 판권을 산 무명 작가 작품이 대히트를 치자 노인의 말을 되새기며 술⋅담배⋅도박을 모두 끊고 ‘첫 마음’을 먹습니다. 일에서 이기고 싶다, 모든 운을 히트작에 쏟아붓고 싶다, 나를 사람으로 만들어 준 책에 공헌하고 싶다고.

모두에게 가혹했던 2020년이 지나갔습니다. 지난해엔 복을 좀 아낀 셈 치자고 올해 ‘첫 마음’을 먹어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