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나의 장인에게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2021. 1. 2.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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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나의 장인은 평생 농사를 지어온 사람이다. 강원도에서도 시골이라고 할 만한 면소재지에서 약간의 논과 밭을 일구며 산다. 처음 인사를 드리러 갔던 날에는 마침 나무를 하러 간 참이라고 했다. 직접 장작을 패서 난방을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올 때까지 농가 특유의 그 툇마루 같은 데 앉아서 나를 향해 짖는 두 마리의 누렁이를 바라보았다.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장인이, 정확히는 장인이 될 사람이 경운기에 나무를 싣고 돌아왔다. 그의 첫마디는 “우리 사우가 술을 못하게 생겼구먼. 난 술을 못하면 싫은데 말야” 하는 것이었다. 술을 잘하든 못하든 그런 자리에서는 평소에 없던 능력이 발휘되는 법이다. 오기가 생긴 나는 “아닙니다, 저 술 좋아합니다”라고 말했고, “그럼 어디 한 번 같이 마셔보세” 하는 그의 말에 술자리를 시작했다.

창고에 자리를 잡고 빨간색 뚜껑의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때 술을 마실수록 정신이 맑아졌던 것 같다. 두세 시간쯤 지나자, 그는 나에게 “세상에 그렇게 술 마시는 사람이 어딨나!” 하고 역정을 내고는 들어갔다. 동시에 술이 오르고 동네 누렁이가 된 나는 아내에게 “내가 이겼어, 집에 가자”라고 말하곤, 집에 와서 먹은 것을 모두 게워냈다.

그 후로는 처가에 갈 때마다 창고에는 삼겹살과 소주가 마련되어 있었다. 내가 와서 반가운 건지, 술을 마실 사람이 와서 반가운 건지 장인은 나의 방문을 무척 반겼다. 평생 농기구를 잡아 온 그의 손은 거칠고, 평생 펜을 잡아 온 나의 손은 매끈했다. 나는 평생 이렇게 거친 손을 가진 사람과 술을 마셔 본 일이 없었다. 아마 그도 마찬가지, 이런 손을 가진 사람과 함께할 일이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취하면 말이 많아졌다. 젊은 시절의 무용담부터 몇 호 안 되는 그 마을의 소식까지,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외아들, 내 처남의 근황을 끊임없이 전해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전·현직 대통령의 이름을 입에 올리기도 했다. 거주지 강원도, 직업 농민, 나이 70대 후반, 그의 정치적 성향은 누구라도 짐작할 만하다. 언젠가 태극기를 들고 광화문으로 가고 싶다고 했을 때는 옆에 있던 나의 아내가 “아빠, 제발 그만 좀 해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 번은 총선에서 어느 당을 지지할 것이냐고 물어서, “이번에 제가 아는 사람이 ○○당 비례대표가 되었는데, 그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면 저에게도 좋은 일이 좀 있을 듯합니다”라고 말했다. 그 후 아내에게서 장인어른이 생애 처음으로 ○○당을 지지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작전 성공이네, 하고 나는 웃었다.

그는 술에 많이 취했던 어느 날, 열린 창고문을 가리키며 문득 말했다. “저기 다리 보이지, 저 위에서 우리 마을 사람들이 인민군에게 다 죽었어. 나는 그때 중학생이었는데 숨어서 지켜봤지….” 나는 그때 처음으로 그를 이해하게 된 것 같다. 한 시대가 그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그래서 몹시 미안해지고 말았다. 내가 뭐라고, 총선에서 누구를 지지하시라고 얄팍한 참견이나 하고. 그래선 안 되는 것이었다.

2020년은 ‘확증 편향의 시대’라는 말로도 정리된다. 편을 가르고 서로의 입맛에 맞는 채널을 구독한다. 그러나 어떠한 확증을 갖게 되었든 반대편의 타인을 이해하는 일을 함께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미워해야 할 대상은 그렇게 편을 가르고 이익을 취하는 이들이다. 소위 ‘○○코인을 탄’, 한 시대에 상처받은 사람들의 감정을 부추기는 사람들을 경계해야 한다.

그를 이해하는 일이 조금 빨랐더라면 좋을 뻔했다. 장인은 이제 같이 술을 마실 만큼 건강하지 않다. 나에게 “사우 왔는가” 하고 웃곤 외손주들과 함께 논다. 홀로 마시는 술은 외롭다.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을 때 그에게 조금 더 다정하고 정중하게 대할 것을 그랬다.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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