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출동 명령 받은 펑위샹, 군사 돌려 수도 베이징 점령
통일 눈앞에 두고 펑위샹이 찬물
톈진서 만나 관할지 재분배 협상
장, 상하이 포함 노른자위 차지
펑, 실속없는 서북지역 할당받아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58〉
1920년 중엽, 중공 초기 지도자 탄핑산(譚平山·담평산)이 비교적 명확한 정의를 내렸다. “특수한 세력을 장악해 특수한 계급을 창출하고, 특별한 조직을 형성한 사람”이라고 단정했다. 민주주의 혁명가 쑨원(孫文·손문)은 군벌을 확고한 기반을 가진 정치세력으로 인정했다. 정국군(靖國軍) 사령관 위유런(于右任·우우임)에게 보낸 답신에서 가볍게 언급했을 뿐, 군벌이라는 용어를 거의 입에 담지 않았다. 2차 즈펑(直奉)전쟁을 준비하던 펑(奉)파 수령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의 도움을 받아들이고 완(晥)파 영수 돤치루이(段祺瑞·단기서)와도 손을 잡았다. 영입을 타진한 펑위샹(馮玉祥·풍옥상)의 제안에도 군말 없이 응했다. 사생활은 물론, 매사에 문란했던 산둥(山東)군벌 장쭝창(張宗昌·장종창)도 남들처럼 인간잡종이라고 매도하지 않았다.
2차 즈펑전쟁, 북양정부 몰락 재촉
1924년 9월 13일부터 50일간 계속된 2차 즈펑전쟁이 북양정부 몰락의 맹아(萌芽)였다. 이 전쟁은 전형적인 군벌전쟁이었다. 모략, 이간질, 회유, 빈말, 헛소문, 배신 등이 난무했다. 대군벌은 중소군벌 회유에 거금을 살포하고, 지방의 이름 없는 군벌들은 눈치 보기에 급급했다. 외세와의 결탁도 서슴지 않았다. 누가 이기건 매일반이다 보니, 일반국민들은 관심이 없었다. 규모에 비해 군인들 외에는 인명 피해도 크지 않았다. 소풍 삼아 먼발치에서 전쟁 구경하는 관람객이 많을 정도였다. 결과는 남방의 혁명세력과 연합해 즈파 분열에 성공한 장쭤린의 완벽한 승리였다.
펑위샹 암살 계획, 장쭤린이 막아
2차 즈펑전쟁이 발발하자 우페이푸는 펑위샹에게도 출동 명령을 내렸다. 전투병력을 배당받은 펑은 총통 차우쿤(曹錕·조곤)에게 달려갔다. 옛 부하를 베이징 경비부사령에 추천했다. 10월 23일 밤, 전지로 향하던 펑의 병력이 베이징으로 이동했다. 닫혀있던 성문이 열렸다. 펑은 총알 한 방 안 쏘고 수도 베이징을 점령했다. 전선에 있던 우페이푸는 병력 5000명을 데리고 남쪽으로 도망쳤다. 당황하기는 장쭤린도 마찬가지였다.
펑위샹은 북양원로 돤치루이를 임시집정(執政)에 추대했다. 총통과 총리를 겸한 돤은 권위가 넘쳤다. 창장(長江)유역의 즈파 실력자들이 지지를 표명하자 자신의 근거지 톈진에 회의를 소집했다. 11월 8일, 장쭤린과 펑톈주재 외국 영사들이 탑승한 전용열차가 산하이관(山海關)을 통과했다. 톈진에 도착하자 장갑차 12대가 장의 차량을 에워쌌다. 장쭤린의 참모들이 보기에 펑위샹은 애물단지였다. 암살을 기도했다. 장쭤린의 한마디에 계획을 접었다. 3일간 계속된 회의는 관할지역 재분배였다. 상하이를 포함한 노른자는 장쭤린이 차지했다. 지반이 없던 펑위샹은 실속이 없었다. 황무지나 다름없는 서북지역을 할당받았다.
평화는 요원했다. 사회 곳곳에 침투한 공산당과 새로운 모순이 발생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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