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출동 명령 받은 펑위샹, 군사 돌려 수도 베이징 점령

2021. 1. 2.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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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쭤린, 2차 즈펑전쟁 이겼지만
통일 눈앞에 두고 펑위샹이 찬물
톈진서 만나 관할지 재분배 협상
장, 상하이 포함 노른자위 차지
펑, 실속없는 서북지역 할당받아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58〉
임시집정에 취임한 북양정부 원로 돤치루이. 1924년 11월 24일, 베이징. [사진 김명호]
군벌(軍閥)이라는 명사는 신당서(新唐書)에 처음 등장한다. 전공(戰功)이 혁혁한 집단이나 집안을 지칭했다. 근대에 들어와 폄사(貶辭)로 변질됐다. 시작은 중국공산당의 초석을 놓은 천두슈(陳獨秀·진독수)였다. 1918년 말, “지식이 전무하고, 국가에 대한 공이나 능력도 없는, 마적이나 다름없는 군벌들이 정치에 관여해 국법을 파괴한다”며 북양정부를 맹공했다. 개량주의자 량치차오(梁啓超·양계초)도 유럽여행 중 이런 말을 남겼다. “군벌통치는 약육강식의 산물이다. 자멸할 날이 멀지 않았다.”

1920년 중엽, 중공 초기 지도자 탄핑산(譚平山·담평산)이 비교적 명확한 정의를 내렸다. “특수한 세력을 장악해 특수한 계급을 창출하고, 특별한 조직을 형성한 사람”이라고 단정했다. 민주주의 혁명가 쑨원(孫文·손문)은 군벌을 확고한 기반을 가진 정치세력으로 인정했다. 정국군(靖國軍) 사령관 위유런(于右任·우우임)에게 보낸 답신에서 가볍게 언급했을 뿐, 군벌이라는 용어를 거의 입에 담지 않았다. 2차 즈펑(直奉)전쟁을 준비하던 펑(奉)파 수령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의 도움을 받아들이고 완(晥)파 영수 돤치루이(段祺瑞·단기서)와도 손을 잡았다. 영입을 타진한 펑위샹(馮玉祥·풍옥상)의 제안에도 군말 없이 응했다. 사생활은 물론, 매사에 문란했던 산둥(山東)군벌 장쭝창(張宗昌·장종창)도 남들처럼 인간잡종이라고 매도하지 않았다.

2차 즈펑전쟁, 북양정부 몰락 재촉

북양정부 시절(1912-1928) 중국에는 약 45개의 군벌이 근거지에서 왕 노릇을 했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무명의 군벌까지 합치면 정확한 통계가 불가능 할정도였다. [사진 김명호]
1926년 7월, 장제스(蔣介石·장개석)가 지휘하는 국민혁명군이 북벌(北伐)에 불을 댕겼다. “군벌타도”가 구호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론가 후한민(胡漢民·호한민)이 “국익을 고민한 적이 없고, 해방을 요구하는 민중의 외침을 무시하는 집단, 관료, 정객, 토호 등 반혁명세력에게 호랑이 옷을 입혀 전면에 내세우고, 뒤로는 제국주의와 결탁한 군벌타도가 우리의 최종목표”라며 열변을 토했다. 장제스도 빠지지 않았다. “군벌은 지반 유지 외에는 관심이 없다. 사유재산 증식과 목숨 보존에만 급급하다 보니, 무슨 일이건 제국주의에만 의존한다.” 북벌전쟁은 1928년 12월, 동북의 지배자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이 국민당에 충성을 맹세하면서 막을 내렸다. 북양정부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24년 9월 13일부터 50일간 계속된 2차 즈펑전쟁이 북양정부 몰락의 맹아(萌芽)였다. 이 전쟁은 전형적인 군벌전쟁이었다. 모략, 이간질, 회유, 빈말, 헛소문, 배신 등이 난무했다. 대군벌은 중소군벌 회유에 거금을 살포하고, 지방의 이름 없는 군벌들은 눈치 보기에 급급했다. 외세와의 결탁도 서슴지 않았다. 누가 이기건 매일반이다 보니, 일반국민들은 관심이 없었다. 규모에 비해 군인들 외에는 인명 피해도 크지 않았다. 소풍 삼아 먼발치에서 전쟁 구경하는 관람객이 많을 정도였다. 결과는 남방의 혁명세력과 연합해 즈파 분열에 성공한 장쭤린의 완벽한 승리였다.

전쟁은 좋은 구경거리였다. 교전 예상지역에 몰린 지역 주민들. [사진 김명호]
통일의 문턱까지 온 장쭤린에게 펑위샹이 찬물을 끼얹었다. 펑위샹은 186센티미터의 거구에 조잡하고 미련해 보였다. 실제는 딴판이었다. 매사에 주도면밀했다. 미약한 군 지휘권마저 박탈한 우페이푸(吳佩孚·오패부)에게 앙심을 품었다. 힘이 없다 보니 골려 먹기를 좋아했다. 부하가 작은 일화를 남겼다. “우페이푸는 술을 좋아했다. 샤오싱지우(紹興酒)에서 브랜디까지 무슨 술이건 가리지 않았다. 생일선물 행렬이 줄을 이었다. 펑 장군도 부관 편에 축하서신과 커다란 항아리를 선물로 보냈다. 우 장군은 술인 줄 알고 한 사발 들이키다 확 토했다. 똥물인 줄 알았던 우 장군은 서신에 옥천산(玉泉山) 성수(聖水)라고 쓰여있는 것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서신 내용 모르는 부관이 실수를 했다. 무슨 물이냐고 묻자 부대 빨래터에서 퍼온 물이라고 상세히 설명했다.”

펑위샹 암살 계획, 장쭤린이 막아

산둥군벌 장쭝창은 부인이 몇 명인지 본인도 몰랐다. 19번째 부인(가운데)이 유일한 모습을 남겼다. [사진 김명호]
펑위샹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일면식도 없는 쑨원을 존경했다. 성경과 쑨원의 저술을 보물처럼 끼고 다녔다. 광적일 정도로 금욕에 철저했다. 아편과 여자를 멀리하고 재물도 탐하지 않았다. 부하들에게 청결도 강조했다. 병사 한 명의 발에서 썩은 냄새가 진동하자 직접 닦아주며 양말 벗은 지가 얼마만이냐고 물었다. 석 달 됐다고 하자 나도 한 달에 한 번은 발을 물을 담근다며 화를 냈다.

2차 즈펑전쟁이 발발하자 우페이푸는 펑위샹에게도 출동 명령을 내렸다. 전투병력을 배당받은 펑은 총통 차우쿤(曹錕·조곤)에게 달려갔다. 옛 부하를 베이징 경비부사령에 추천했다. 10월 23일 밤, 전지로 향하던 펑의 병력이 베이징으로 이동했다. 닫혀있던 성문이 열렸다. 펑은 총알 한 방 안 쏘고 수도 베이징을 점령했다. 전선에 있던 우페이푸는 병력 5000명을 데리고 남쪽으로 도망쳤다. 당황하기는 장쭤린도 마찬가지였다.

펑위샹은 북양원로 돤치루이를 임시집정(執政)에 추대했다. 총통과 총리를 겸한 돤은 권위가 넘쳤다. 창장(長江)유역의 즈파 실력자들이 지지를 표명하자 자신의 근거지 톈진에 회의를 소집했다. 11월 8일, 장쭤린과 펑톈주재 외국 영사들이 탑승한 전용열차가 산하이관(山海關)을 통과했다. 톈진에 도착하자 장갑차 12대가 장의 차량을 에워쌌다. 장쭤린의 참모들이 보기에 펑위샹은 애물단지였다. 암살을 기도했다. 장쭤린의 한마디에 계획을 접었다. 3일간 계속된 회의는 관할지역 재분배였다. 상하이를 포함한 노른자는 장쭤린이 차지했다. 지반이 없던 펑위샹은 실속이 없었다. 황무지나 다름없는 서북지역을 할당받았다.

평화는 요원했다. 사회 곳곳에 침투한 공산당과 새로운 모순이 발생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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