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코로나 대전환..가야 할 길은 '자주·복지·생태국가'

한겨레 2021. 1. 1.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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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새해 연속기고 : 11개의 질문][새해 연속기고] 2021, 11개의 질문
① 포스트 코로나 대전환
코로나19의 짙은 그림자가 걷히지 않은 채 새해를 맞는다. 코로나19는 우리의 일상과 인식과 삶과 관계를 모두 바꿨다. 그동안 인류가 구축해온 유·무형의 자산과 가치와 체계와 질서를 코로나19는 하루아침에 허물어뜨렸다. 코로나19가 사라지더라도, 세상은 코로나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많다. 코로나19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는 2021년 초두, <한겨레>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코로나19 이후의 전망을 담은 석학과 전문가들의 특별기고 ‘2021, 11개의 질문’을 마련했다.

김누리 중앙대 교수(독문학)

하나의 세계가 무너지고 있다. 당연하다고 여겨온 많은 것들이 낯설어지고, 견고하다고 생각해온 수많은 것들이 흔들린다. 영원하다고 믿어온 것들이 하릴없이 부서져 내리고 있다. 폐허 속에서 공포가 엄습한다. 우리가 이 세계를 통제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덮쳐오는 공포의 정체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하나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미국 헤게모니가 이울고, 자본주의 시대가 기울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수명을 다하고, 서구의 지배가 종말로 치닫고 있다. 물질지상주의, 경쟁 이데올로기에 의문부호가 박히고 있다. 구시대가 급속히 스러지는 가운데, 새로운 시대의 비전은 보이지 않는다. 불안한 과도기를 우리는 건너고 있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건 근대의 최종적 죽음인지도 모른다. 18세기 이래 지속돼온 낙관주의의 성채가 처참히 허물어지고 있다. 19세기 말에 덮쳐온 낙관적 세계관의 붕괴(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의 세계)에 이어 이제 거대한 제2차 붕괴가 목전에 와 있다. 제2차 붕괴가 ‘거대한’ 이유는, 정신사적 성격을 띤 1차 붕괴와 달리, 그것이 자연사적(생태적) 성격을 지녔기 때문이다.

민족주의, 국가주의, 개인주의에 기초한 근대의 기획은 이제 종막에 다다른 것처럼 보인다. 인류, 세계, 공동체의 가치가 새롭게 떠오른다. 역사상 어느 시대에도 인류가 운명공동체임을 오늘날처럼 뼈저리게 체험한 적은 없었다. 과연 인간은 추락한 인류의 개념을 구제함으로써 자신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인가.

과도기의 폐허 속에서,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지금껏 당연시해온 모든 것들이 새롭게 눈에 잡힌다. 이제 우리는 한국 사회를, 미국을, 자본주의를 문득 낯선 눈으로 마주한다.

코로나의 폐허 속에서 우리는 한국인의 삶이 얼마나 아슬아슬한 벼랑 끝 삶인지 처절하게 깨닫는다. 누구라도 한순간에 추락할 수 있고, 어떤 이도 한 발짝에 실족할 수 있다. 국가는 나의 삶을 지켜주지 않는다. 세계 최고의 자살률, 최악의 기업살인율, 최저의 출산율은 그런 ‘낭떠러지 생존’의 징표일 뿐이다. 어떤 안전망도 보호장치도 없는 불안사회가 대한민국을 “현대 니힐리즘의 가장 급진적인 형태”(프랑코 베라르디)로 만들었다.

지난 70년간 우리가 맹목적으로 추종해온 동경의 대상이 코로나로 인해 추한 민낯을 드러냈다. 의료와 방역, 인종과 정치 문제에서 미국이 보여준 야만성에 세계에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이는 아마도 한국인일 것이다. 사회보장도, 공공의료도, 공적 서비스도 극히 부실한 사회를, 그래서 유럽에서는 통상 ‘사회적 지옥’이라고 불리는 나라를, 한국인들은 가장 이상적인 모델로 오인해왔던 것이다.

한국인이 견고하고 ‘영원한’ 체제라고 생각해온 자본주의도 흉측한 ‘생얼’을 내보였다. 신자유주의 30년이 휩쓸고 간 폐허에 우리는 매일 참관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폭풍이 거세게 불어닥친 국가일수록 코로나가 남긴 참상은 처연하다. 자유시장의 공세 속에서 ‘공적인 것’(the public)이 괴멸한 속 빈 ‘공화국’(republic)들이 초미세 바이러스의 공격에 맥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코로나 시대는 우울하다. 코로나 블루의 일상이다. 그러나 이제 코로나 블루를 넘어 코로나 옐로를 보아야 한다. 코로나의 경고를 읽어야 한다.

코로나 대유행이 보내는 경고는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가 중요한 두가지 가치를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첫번째는 ‘사회적 가치’이다. ‘모두가 건강하지 않으면 누구도 건강할 수 없고, 모두가 행복하지 않으면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는 범용한 지혜가 우리에겐 너무나 절박한 정언명령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지만, 한국인은 사회적 동물이 아니다. 한국인은 무한경쟁 속에 각자도생하는 개인들이다. 지구상에서 ‘사회적’이라는 가치가 이렇게 천대받는 공동체는 없다. ‘사회적’이라는 말이 기피되는 정도를 넘어, 불온시되고, 낙인이 되는 곳이 이 나라다.

두번째는 ‘생태적 가치’이다. 자연 생태계 파괴를 멈추지 않으면 인류는 종말을 면할 수 없다. 그러나 한국 사회엔 생태적 상상력이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 물질주의, 발전주의, 성장주의가 공론장을 지배하는 유일한 담론이다. 이런 자본절대주의 사회에서 68혁명 이후 도도한 세계적 흐름으로 자리 잡은 탈물질주의 생태문화는 여전히 먼 나라 이야기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코로나 위기는 우리 사회에 혁명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근본적인 체제 변화와 근원적인 인식 변화가 있어야 한다. 코로나 대유행이 깨우쳐준 길은 분명하다. 자주국가, 복지국가, 생태국가가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

대한민국은 이제 명실상부한 자주국가가 되어야 한다. 건국된 지 한 세기가 지났음에도 여전히 미국의 속국처럼 행동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코로나가 드러낸 미국의 충격적인 실상은 미국을 맹목적으로 좇아가는 것이 ‘지옥으로의 행진’이 될 수도 있음을 경고한다.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지나갔고, 미국 헤게모니도 끝났다. 한류와 케이방역은 우리가 미국보다 더 잘할 수 있는 것이 얼마든지 많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었다. 한반도 평화 문제도 그렇다. 정부는 이제 관성화된 무력감을 떨치고 한반도에 새로운 상황을 주도적으로 창출해야 한다.

복지국가로의 전환 또한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생존의 벼랑에 매달려 있다. 더 이상 자살과 빈곤과 기업살인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청년의 80%가 자기 나라를 ‘헬조선’이라고 부르고, 75%가 이민을 가고 싶다고 느낀다면, 그 나라는 이미 망한 나라다. 근본적인 새 출발, 혁명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복지국가가 유일한 답이다. 각자도생의 극단적 개인주의 사회에서 벗어나 모든 국민이 생존의 불안 없이 존엄한 존재로서 살 수 있는 연대사회로 전환해야 한다.

나아가 생태국가로의 질적인 변화도 감행해야 한다. 발전 논리, 성장 이데올로기는 낡은 시대의 유물이다. 무한히 자연을 파괴하는 발전은 지구 종말로의 발전이며, 생태계의 순환을 깨뜨리는 성장은 지옥으로의 성장이다. ‘22세기는 오지 않는다’ ‘지금 사는 인류가 최후의 인류다’라는 세상의 경고를 이제는 우리도 귀담아들어야 한다. ‘기후 악당’ ‘생태 깡패’라는 말을 더 이상 들어서는 안 된다.

2021년은 새로운 대한민국의 원년이 되어야 한다. 새로운 대한민국은 어느 누구도 일하다 죽지 않고, 노조 하다 쫓겨나지 않고, 살 수 없어 자살하지 않는 복지국가, 근대국가의 기본 원리인 국민주권과 민족자결이 구현되는 정상적인 자주국가,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이 실현되는 생태국가여야 한다.

지금 인류는 문명사적 전환점에 서 있다. 물질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이 거대한 전환에 인류의 생존이 걸려 있다. 과학자는 말한다. 최후의 생물 대멸종이 목전에 있다고. 지구 역사 45억년 동안 다섯번의 생물 대멸종이 있었다. 소행성 충돌, 빙하기 도래 등 자연현상이 원인이었다. 이제 2050년으로 예상되는 6차 대멸종은 인간이 자초한 최초의 대멸종이요, 지구의 종말을 초래할 최후의 대멸종이 될 것이다. 경제학자는 말한다. 인류는 기원후 1800년 동안 5배의 물적 성장을 이루었지만, 자본주의가 본격화한 지난 200년간 무려 100배의 물적 발전을 이루었다고. 그런데 물적 발전은 무엇인가. 자본주의의 경이로운 생산력의 이면은 자연에 대한 무자비한 파괴력이다.

아도르노는 이를 ‘계몽의 변증법’이라 했다. 계몽, 즉 인간의 자연지배가 자연의 파괴, 인간성의 파괴를 초래했다. 근대는 이러한 역설 위에 세워진 건물이다. 발전이 퇴보이고, 성장이 몰락이며, 생산이 파괴이다. 이제 인류가 살아남으려면 ‘계몽의 계몽’을 통해 계몽의 자기파괴를 멈춰 세워야 한다. 이것이 시대의 명령이다. 이 세상을 아름다운 유토피아로 만들지는 못할지언정, 이 지구가 완전한 지옥이 되는 것은 막아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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