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자의 이익' 넘어 참된 정의를 찾아서

고명섭 2021. 1. 1.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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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학자 안재원 교수, 그리스 고전 통해 '정치적 정의' 다시 사유
"공멸 피하려면 반공주의·지역주의·성장주의·사대주의 극복해야"

아테네 팬데믹: 역병은 어떤 정치를 요구하는가

안재원 지음/이른비·1만3000원

플랑드르 화가 미힐 스베이르츠(1618~1664)의 <아테네 역병>. 역병에 휩쓸린 아테네의 절망적 상황을 묘사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인류가 산출한 고전은 시간을 건너뛰어 지금 이 시대를 조망하고 우리의 과제를 검토하는 데 필요한 시야를 열어준다. 고전이야말로 사유의 원천이고 생각의 뿌리다. 서양고전학자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의 <아테네 팬데믹>은 그리스 고전기 역사·문학·철학 작품들을 통해 ‘코로나 대유행’이라는 세계사적 재앙을 들여다보며, 자연적 재앙이 사회적 재앙으로 번져나가는 것을 막으려면 어떤 정치가 필요한지를 숙고하는 책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고전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에우리피데스의 <미친 헤라클레스>, 플라톤의 <국가> 그리고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다. 흥미롭게도 이 책들은 모두 직간접적으로 역병과 관련이 있다. 이 책들이 ‘정치적 정의’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도 흥미롭다. 지은이는 이 고전들을 차례로 답사하며 ‘강자의 이익’이 정의라는 현실주의적 정의관과 ‘친구를 사랑하고 적을 미워하라’는 배제주의적 정의관을 비판적으로 살피고 올바른 정의의 모습을 찾아 나간다.

지은이가 가장 먼저 펼치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기원전 431년에 스파르타의 침공으로 시작돼 404년 아테네의 패배로 끝나기까지 27년여의 역사를 서술한 책이다. 전쟁의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름 모를 역병이 아테네를 덮친다. 투키디데스의 책은 그 역병이 가져온 재앙을 냉정하게 묘사한다. 주목할 것은 이 역병 묘사에 앞서 투키디데스가 아테네 정치지도자 페리클레스의 유명한 ‘전몰용사 추도 연설’을 배치했다는 점이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의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와 ‘자유’를 열거한 뒤 “우리나라 전체가 헬라스 세계의 학교”라고 말하며, 다른 나라에 모범이 되는 이 나라를 지키자고 역설한다. 그러나 페리클레스마저 추도 연설 뒤 역병으로 쓰러지자, 아테네의 정치 질서는 해체되고 나라는 초토가 되고 만다. 역병은 5년여 동안 맹위를 떨치다가 서서히 물러나지만, 살아남은 아테네인들은 절도를 잃고 탐욕에 사로잡혔다고 투키디데스는 기록한다. 결국 정치가의 선동에 휩쓸려 시칠리아 원정에 나섰다가 아테네 군대가 몰사하는 참패를 겪는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이렇게 역병이 아테네를 짓누르던 시기에 상연된 작품이다. 소포클레스가 이 비극에서 이야기하려는 것은 ‘정치’, 그중에서도 ‘정치지도자의 올바른 리더십’이다. 이 비극은 오이디푸스가 도시를 휩쓴 역병에 근심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오이디푸스는 역병을 이겨낼 방안을 구하려고 아폴론의 신탁을 청한다. 아폴론의 대답은 ‘선왕 라이오스를 살해한 자를 찾아내 처벌해야만 이 땅을 덮은 더러움(miasma)이 정화될 것’이라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기필코 범인을 밝혀내 ‘더러움’을 몰아내겠다고 다짐한다. 사건을 조사하던 오이디푸스가 맞닥뜨린 것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이 범인이었다는 진실이다. 오이디푸스가 바로 더러움의 원인이었다. 오이디푸스는 진실을 보지 못한 자신의 두 눈을 찌르고, 자기가 한 말에 따라 스스로 추방 길에 오른다. 여기서 지은이는 소포클레스가 ‘약속을 지키고 법률을 준수하는 통치자’ 모습을 부각함으로써 정치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 진실성과 책임감임을 강조했다고 말한다. 소포클레스에 이어 에우리피데스는 <미친 헤라클레스>에서 외부로 향했던 용기가 내부를 짓부수는 광기로 돌변한 헤라클레스를 보여준다. ‘적을 미워하고 친구를 사랑하라’는 아테네의 전통적인 정의관이 친구까지 파멸시키는 지경으로 전락할 수 있음을 헤라클레스의 광란을 통해 경고한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는 역병과 전쟁이 아테네를 집어삼키고 수십 년이 지난 뒤 쓰인 저작이다. 역병과 전쟁으로 붕괴한 나라를 재건하고 삶의 기준을 다시 세우려면, 더 나아가 ‘소수의 행복이 아니라 시민 전체의 행복을 추구하는 나라’를 만들려면 종래의 정의관과는 다른 새로운 정의관이 필요하다는 것이 플라톤의 생각이다. 그 정의를 찾아 플라톤의 시선은 인간의 영혼으로 향한다. 플라톤은 인간 영혼이 이성과 기개와 욕망으로 구성돼 있다고 본다. 이 세 부분이 제구실을 하되 욕망이 멋대로 날뛰지 않도록 제어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영혼이 ‘자기의 주인’이 되는 길이다. 반대로 욕망이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 쾌락으로 질주할 때 인간은 ‘자기의 노예’가 되고 만다. 이 영혼의 무질서를 바로잡는 것이 바로 정의다. 영혼의 정의는 국가의 정의로 이어진다. 나라의 구성원들이 각각 제 몫을 하며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것이 국가의 정의다. 이렇게 플라톤은 기존의 정의관을 뛰어넘는다.

이 책이 마지막으로 검토하는 것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다. 이 서사시는 그리스와 트로이의 전쟁을 다루고 있지만, 핵심은 전쟁 자체가 아니라 연민과 화해에 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일리아스>의 정점은 사랑하는 친구 파트로클로스가 트로이 총사령관 헥토르의 손에 죽임을 당하자 분노한 아킬레우스가 헥토르와 대결해 목숨을 빼앗는 장면이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주검을 마차에 매달고 파르토클로스의 무덤 주위를 내달린다. 이 장면을 본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모스가 적진으로 들어가 아킬레우스에게 아들의 주검을 돌려달라고 애원한다. 프리아모스의 슬픔을 본 순간 아킬레우스는 마음이 열린다. 가장 사랑하는 이를 잃은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오열한다. <일리아스>는 불구대천의 원수들이 이렇게 슬픔 속에서 화해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벌거벗은 인간’ 그 자체로 보면 원수도 친구도 다를 것이 없다. 여기서 ‘친구를 사랑하고 적을 미워하라’는 배제주의적 정의관이 무너진다. <일리아스>는 인류 최초의 반전문학이다.

고전 읽기를 마친 지은이는 현실로 돌아와 우리 시대가 극복해야 할 네 가지 정치 현상으로 반공주의·지역주의·성장주의·사대주의를 꼽는다. 이 네 기둥의 토대에 있는 것이 ‘강자의 이익’이라는 현실주의 정의관과 친구와 적을 가르는 배제주의 정의관이다. 지은이는 이 정의관이 남북분단 이래 한반도 현대사를 관통해 왔다며 이 완고한 정의관의 극복을 요청한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싸우다 공멸한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것, 이것이 지은이의 결론이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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