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피해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한겨레 2021. 1. 1.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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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폭력에 익숙하게 된 가족부터 2차 가해까지
만화계 실제 사건 다룬 당사자 관점의 고발기록

나, 여기 있어요디담, 브장 지음/교양인·1만6000원

교양인 제공

만화계 성폭력 사건을 그린 디담과 브장의 만화 <나, 여기 있어요>는 2014년께의 사건을 다룬다. 작가가 실제 겪은 만화계 성폭력 사건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중요한데, 만화계뿐 아니라 영화계와 연극계, 문학계를 포함한 ‘예술계’ 성폭력 사건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주인공 현지는 만화가다. 대학에서는 성폭력 예방 교육 강의를 하고, 종종 상담도 한다. 이날의 상담 사연은 이렇다. “저번엔 선생님이 어깨를 풀어준다면서 주무르는데 저는 그게 안마로 느껴지지 않더라고요. 불쾌한 티라도 내면 작업 내내 신경질을 내니까 결국 참자, 참자 하면서 넘어가게 되고.” 그러고는 이야기 말미에 묻는다. “작가님 혹시, 정한섭 사건은 아시나요? 웹툰계에서는 유명하잖아요. 그 사건 피해자들은 업계를 다 떠났대요.” 현지는 아무 말 없이 웃어보이고 집에 돌아와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과거 회상이 시작되는데, 경고 문구가 먼저 나온다. “본 만화는 자살, 성희롱, 성폭력, 가정폭력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으니 감상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자살, 성희롱, 성폭력, 가정폭력. 하지만 실제로는 더 세분화할 수 있다. 가정폭력, 친족성폭력, 만화계 성폭력, 2차가해. 성차별을 가장 먼저 학습시키는 사람들은 가족이다. 아버지, 어머니, 오빠, 나. 4인 가족의 권력자는 바로 종갓집 장손인 오빠였다. 오빠는 거의 모든 일을 원하는 대로 추진할 수 있었지만 “여자인 나”는 다른 대우를 받았다. 어머니는 여자가 많이 배우면 기만 세진다며 대학에 안 보낸다는 엄포를 놓았다. 오빠는 화가 나면 폭력을 휘둘렀는데, 분노 조절 장애라는 오빠의 화는 늘 어머니와 나에게만 향했다.

교양인 제공

이쯤에서 궁금증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만화계 성폭력 사건을 다루었다고 하면서 왜 가족 이야기를 길게 하는가?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상관이 있다. 폭력에 노출되는 첫 번째 장소는 많은 경우 가정이고, 성폭력에 대한 저항을 포기시키는 사람들 역시 다르지 않다.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강하게 항의하기보다 적당히 빠져나오는 법을 익히거나 아무 일도 없던 척하는 게 제일 낫다는 심리를, 꾸준히 학습하게 된다. 현지는 고등학교 졸업 후 과외를 하게 되는데 어린 남자아이가 자꾸 가슴을 만졌다. 작은아버지는 오랜만에 집에 찾아와서는 방으로 들어와 성추행을 했다. 현지는 어렵사리 어머니에게 말을 꺼냈는데, 어머니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멍한 표정을 짓다가 “그럼 빌린 돈은 안 갚아도 되겠다”라고 농담처럼 말한 뒤 친척들에게 소문을 냈다. 집을 나와 쉼터에 가고 싶었지만 경찰은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고, 어머니에게서는 귀신 들렸다는 말을 들었다.

성장 과정 내내 이런 일에 노출된 뒤 집에서 나가 살려고 해도 애초에 진학 문제에 비협조적이었던 가족이 독립이라고 적극적으로 도울 리가 없었다. <나, 여기 있어요>의 주인공은 집에서 벗어나기 위해 유명한 웹툰 작가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출근 첫날, 집에 데려다주는 차 안에서 만화가는 몇 살 연상까지 만날 생각이 있는지 묻더니 “내가 지금 너한테 무슨 짓 하고 저 산에 묻으면 아무도 너 못 찾아”라고 했다.

성폭력을 당하면 분명하게 거절의 의사표현을 하라고 배우지만 실제 상황은 즉각적인 저항이 어려울 때가 많다. #오빠미투 #스쿨미투 사례가 특히 그렇다. 가정, 학교, 직장에서 벌어지는 성폭력 사례를 살펴보면 피해자의 생활, 진학, 취업과 승진에 직접 영향을 줄 수 있는 가해자들이 서서히 길들이듯 강도를 높여가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피해자에게 갈 곳이 없다면 가해는 더 빠르게 노골적이 된다. <나, 여기 있어요>의 현지 역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기 때문에 가족에게 도움을 구할 수 없었다. 게다가 웹툰 작가는 현지의 그림 실력을 곧잘 평가절하했다. “쓰레기야, 쓰레기.” 그림을 가르쳐준다던 웹툰작가의 말은 알아서 배우라는 말로 바뀌었고, 지원금을 문하생에게 신청하게 한 뒤 착복하는 횡령도 저질렀다. “너희를 위해서”라는 헛소리를 그때는 믿었다고 적혀 있다.

안마를 시키고, 자기가 안마해주겠다면서 만지고. 밤샘작업을 시킨 뒤 데려다주면서 “너희는 스리섬을 어떻게 생각하니?”라고 묻고. 아내가 친정에 갔다면서 집에 와서 자고 같이 출근하자 하고. “아뇨? 집 갈 건데요?”라고 정색하면 “나도 농담한 건데?”라고 눙치고. 즉각적으로 거절의사를 표시하면 피해자를 ‘예민한 사람’ 취급을 하고 가만히 있다가 피해를 당하면 ‘무언의 동의’가 있었다고 우긴다. 게다가 <나, 여기 있어요>의 웹툰작가는 만화협회 이사였고, 자신의 영향력을 끊임없이 과시하는 유형이었다. 같이 일하는 현지와 지영이 고소를 결정하고 나서 벌어지는 일도 중요하다.

디담, 브장 작가는 피해를 경험한 입장에서 만화를 그리며 이야기의 중심을 크게 셋으로 나누었다. 차별과 폭력에 익숙해지게 만든 가족, 영향력과 유명세를 바탕으로 성폭력과 노동착취를 일삼던 웹툰작가, 법적 대응을 결정한 뒤 벌어진 일과 2차 가해자들. “그리고 4년 뒤, 2018년 미투 운동이 터져 나왔고 나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오랫동안 미온적으로 대응하던 만화협회가 그제야 일을 마무리짓고 싶다며 연락해온 것이다.

<나, 여기 있어요>는 결말 부분에서는 다소 학습만화 같은 마무리가 되는데, 실제 사건 피해자가 실제 사건을 전달하면서, 더 많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게 하려는 분명한 정보전달의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런 듯하다. 주인공이 미리 알았다면 좋았으리라고 후회하는 것들은 지금 프리랜서로 창작 노동을 시작하는 단계의 사람들이 알아야 할 사항이다. 당사자 관점의 성폭력 고발 기록이 갖는 장점이기도 하다. ‘의미’를 중심으로 사건을 재구성하는 게 아니라, 성폭력이라는 사건을 포함한 개인의 삶을 이야기하려고 노력한다.

이다혜 작가,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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