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 준공 10일만에 외환위기.."우리는 코로나19도 이겨낼 것"

정한결 기자 2021. 1. 1. 05: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괜찮아요 대한민국]①

2021년 새로운 해를 맞았지만 걱정이 앞선다. 코로나19로 우리는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위기를 겪고 있다. 국내에서만 5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감염되고 수백명이 죽어나갔다. 하루 감염자수는 줄어들 줄 모르고 더 강력한 변종 코로나19의 등장 소식까지 들린다.

여행과 항공 등 많은 산업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자영업자들은 방역을 위한 거리두기 강화로 생존의 기로에 서 있다. 청년들의 취업난은 극심해졌고, 거리두기를 피할 수 없는 시민들은 우울과 분노가 쌓여간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등 숱한 난관을 이겨낸 대한민국이다. 과거 국가적 위기 상황을 이겨낸 우리 주변의 산증인들은 힘줘 말한다. 2021년 우리는 다시 나아갈 것이라고. 코로나19를 넘어설 것이라고.

공장 짓자마자 외환위기…"포기하면 죽는다"


박철규씨. /사진=정한결 기자.

충남 예산에서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박철규씨(91)는 한국전쟁과 외환위기, 금융위기를 모두 견뎌냈다. 박씨는 1997년 'IMF(국제통화기구) 외환위기'에 이미 한 차례 부도를 겪었다. 당시 박씨는 자신의 콘크리트 혼화제 사업이 잘되자 100억원을 들여 새 공장을 지었다. 준공식이 열린 날은 1997년 11월 11일, 한국 정부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 10일 전이었다.

그 공장은 가동도 못한 채 문을 닫았다. 시공을 맡긴 건설사가 사정이 어렵다며 시공비 지불을 요구했지만 갚을 수단이 없어 부도가 났다.

갚을 돈은 16억원이었지만 50억원 대출을 약속했던 은행이 돌아섰다. 공장을 담보로 32억을 먼저 지급하고 18억을 나중에 준다는 계약이었지만 IMF가 터지자 은행은 '돈이 없다'며 거절했다. 박씨는 소송을 고민했지만 수입이 불안한 상황에서 대형은행을 상대로 소송비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새 공장은 경매로 넘어갔다. 박씨 자택과 자택 내 물건에는 '빨간 딱지'가 붙었다. 박씨와 그의 가족 명의 통장에 들어오는 수입은 들어오는 족족 은행이 채갔다.

가압류 처분이 불가한 군인연금으로 입에 풀칠은 했지만 월 80만원으로 다섯 식구를 먹여 살리기는 턱없이 부족했다. 스트레스로 건강이 악화되면서 심장병과 폐렴까지 찾아왔다.

지옥 같은 삶 속에서도 박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이대로 있어서는 안된다. 힘들어도 당당하게 살자"는 오기로 친구 사무실의 한 책상에서 사업을 다시 시작했다. 1998년 4월에는 유일한 직원인 아들과 함께 컨테이너에 2인 사무실을 꾸렸고, 2000년에 축사를 빌려 혼화제 제조를 시작했다. 그러다 2008년에 충남 예산에 공장을 새로 지으며 마침내 재기에 성공했다.

참전용사인 박씨는 "외환위기가 6·25 전쟁보다 훨씬 힘들었는데 죽다 살은 기억 뿐"이라면서 "포기하면 죽는다는 생각에 버텼고, 실제로 그 당시 많은 이들이 죽었다"고 회상한다.

현재 박씨는 간신히 사업의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수입은 고사하고, 직원들 월급 주고 회사가 망하지 않는 수준의 현상 유지에 급급하다. 그럼에도 박씨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는 "이보다 어려운 시절을 견뎌냈다"면서 "위기를 견딘 경험과 역경을 돌파한 실력, 인적 네트워크는 사라지지 않아 언제든 재기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박씨는 "그때도 지금도, 포기만 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가 코로나 사태도 이겨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박씨가 보관하고 있는 군인연금 통장. 박씨는 "힘든 세월을 연금으로만 버텼기에 예전 통장이라도 버리지 못하고 보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정한결 기자.

금융위기에 쓰러진 가정…"모두가 다같이 견뎌내야"
23일 오후 5시쯤 충남 천안시에서 편의점을 운영하고 있는 김모씨(54)가 매대에 물건을 정리하고 있다./사진제공=편의점주 김모씨

충남 천안시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김모씨(54)도 희망을 이야기한다.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올라갈수록 손님은 줄고 매출도 곤두박질쳤지만 그는 "이 고난도 언젠가 끝난다는 마음으로 서로 다독여주고 이겨내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김씨는 지난 2008년 격변기를 겪었다. 당시 발생한 글로벌 금융위기는 남편이 운영하던 건설 하청 회사를 부도 위기로 내몰았다. 원청 기업의 줄도산 속 어렵게 구한 공사 대금마저 사기로 갈취 당하자 빚더미에 올랐다.

남편은 몇 푼이라도 벌기 위해 일용직 자리를 찾아 한겨울에도 거리를 배회했다. 혹독한 추위에 귀, 허벅지, 손, 발가락이 동상에 걸렸고 걷기조차 힘든 삶이 계속됐다. 보다 못한 김씨는 보유한 부동산을 전부 처분해 천안의 대학가에 남편이 운영할 편의점을 차렸다.

그 때부터 지옥이 시작됐다. 알바생을 고용할 형편이 안돼 박씨도 편의점을 지키기 위해 15년 다닌 병원 사무직을 그만뒀다. 2년 간 매일 13시간을 남편과 교대로 일했다. 김씨는 "물건 정리를 하다가 창고에서 크게 운 적도 많다"면서 "남편이 사실 원망스러웠다"고 회상했다.

어려웠던 시절이지만 김씨는 다른 이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았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대학생들이 700원짜리 삼각김밥을 결제하는데 '한도초과' 카드를 들이밀었을 때도 서비스 물건을 제공하는 등 행복을 나눴다. 따뜻한 마음 씀씀이는 든든한 초석이 돼 돌아왔다. 그의 편의점은 학생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면서 단골손님을 확보할 수 있었다. 수입이 늘자 2016년 12월에는 2호점을 냈다. 김씨는 "당시를 생각하면 '너무 잘 이겨냈다, 이렇게 열심히 살았구나'하는 대견함에 지금도 눈물이 막 쏟아진다"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김씨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은 주변과 함께 잘 살아가자는 마음에서 나온다고 본다"면서 "대구경북에서 코로나가 처음 터졌을 때, 전국에서 의료인과 봉사자들이 모여들지 않았나. 그 마음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도 선별진료소, 검사소 같은 곳에 강추위에 맞서 희생하는 분들이 많다. 시기는 장담할 수 없지만 반드시 이겨낼 것"이라고 강조했다.

[관련기사]☞ 유승준, '나나나' 작곡한 김형석에 "친했어야 손절하지"보름만에 집밖 나온 조두순…30분간 어디 갔었나중국도 '변이 코로나' 뚫렸다…英입국 20대 여성10살 주인 구하려다…늑대와 혈투 벌이고 숨진 반려견전효성, 볼륨감 뽐낸 패션…"역시 원조 베이글녀"
정한결 기자 hanj@mt.co.kr, 이강준 기자 Gjlee1013@mt.co.kr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머니투데이 & mt.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