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백신 여권

김홍수 논설위원 2021. 1. 1. 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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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한 인천공항 - 지난 3월 인천국제공항 1터미널 3층 출국장. /연합뉴스

중국 명·청 전쟁 시기, 명나라에선 주기적으로 천연두가 창궐한 반면 청나라 만주 일대는 천연두 청정 지역이었다. 만주족 출신 청 황제들은 명과 전쟁을 벌일 때 천연두 감염에 의한 군대 몰살 위험을 걱정했다. 그래서 찾은 해법은 천연두를 앓아 면역 항체를 가진 장수, 장병 위주로 선발 공격조를 편성하는 것이었다. 당시 공격조 선별 기준은 천연두가 얼굴에 남긴 ‘곰보 자국’이었을 것이다.

▶천연두 사례에서 보듯 가장 원초적인 신체 증명 수단은 ‘몸’ 그 자체다. 상처, 흉터, 문신, 피부색 등 신체 특성이 신분증 역할을 대신하다 중세 이후 ‘증명서’가 등장했다. 봉건시대 왕이나 영주들은 중요 임무를 띤 사절이나 귀중품을 수송하던 상인에게 ‘통행증’을 발급했다. 이런 통행증을 이탈리아에선 파사포르티(passaporti), 독일에선 파스보르텐(passborten)이라 불렀다. 성문(porti)이나 울타리(borten)를 통과(pass)할 수 있는 증명서란 뜻이다. 여권(passport)의 어원이 됐다.

/일러스트

▶중세 유럽을 휩쓴 흑사병은 신분증 역사에 ‘혁신’을 가져왔다. 행정 관청 도장과 의사의 사인이 담긴 ‘위생증’이 출현했다. 이것이 여행자의 필수품이 되면서 신분증 대중화 시대를 낳았다. 검역이란 말도 페스트 때문에 생겼다. 도시 국가 베네치아에선 페스트를 막으려고 찾아온 선박들을 항구 밖에서 40일간 격리시켰다. ’40일'이란 뜻의 quarantine이 ‘검역’을 의미하는 단어가 됐다.

▶코로나 백신이 등장하면서 면역 증명서 격인 ‘백신 여권’ 도입이 구체화하고 있다. 여행업 비율이 높은 유럽 정부와 코로나 직격탄을 맞은 항공 업계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루프트한자, 유나이티드항공, 캐세이퍼시픽 등 주요 항공사들은 코로나 검사 결과와 백신 접종 정보를 담는 백신 여권을 개발했다. QR코드 형태로 스마트폰 앱에 저장해 해외 통행증으로 활용하는 개념이다. IT 기업들은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위·변조가 어려운 백신 여권 시스템을 구상하고 있다. 이스라엘 정부는 새해부터 코로나 백신 접종 증명서인 ‘그린 여권’을 발급한다고 한다.

▶백신 여권이 등장하면 백신 접종이 뒤처진 나라 국민들이 차별받을 수 있다는 점이 벌써 논란이 되고 있다. 현재 한국은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나라 수(189국) 면에서 세계 3위 여권 선진국이다. 하지만 백신 여권 세상이 되면 상황이 180도 달라질 수 있다. 백신 접종에서 한국이 뒤처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여권 소유가 특권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을 생각나게 하는 ‘백신 여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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