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광종의 차이나 別曲] [121] 느리지만 먼 길을 가는 소

유광종 종로문화재단대표 2021. 1. 1.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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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에 무거운 짐을 지고 묵묵히 길을 나서 먼 곳에 이르는 행위를 가리키는 성어는 부중치원(負重致遠)이다. 이 말의 유래에 직접 등장하는 동물은 소다. 잽싼 짐승에 비해 퍽 느린 걸음, 우둔해 보이지만 결국 먼 길을 걷는 소의 이미지가 생생하다.

중국에서 소는 고초를 견디는 인고(忍苦)의 상징이다. 왕조의 전제적 통치하에 말없이 괴로움을 참아내던 숱한 중국의 농민들 심성에 소를 견주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욕됨을 참으며 제 할 일을 끝내는 인욕(忍辱)의 대명사로 쓰일 때도 있다.

/일러스트=김성규

그런 소의 심성으로 큰일을 이룬 인물들도 적잖다. 섶에 누워 쓸개를 핥았던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주인공 월(越)나라 구천(句踐), 생식기가 잘리는 형벌을 받았음에도 ‘사기(史記)’를 지은 사마천(司馬遷), 동네 왈패의 다리 밑을 기었던 한(漢)의 명장 한신(韓信) 등이다.

덩치가 커서 둔중해 보이지만 큰 전략적 시야(視野)를 곧잘 자랑했던 중국 역대 왕조의 이미지도 크게 다르지 않다. 느슨한 기미(羈縻) 정책으로 동북아의 국제 정치적 질서를 이끌었던 배포도 어쩌면 소의 이미지를 닮았다.

개혁·개방 뒤의 중국은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포용적인 틀로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뤘다. 그러나 요즘의 중국은 과거의 그런 이미지에서 많이 일탈했다는 느낌을 준다. 요즘 중국의 태도와 행위, 특히 대외 정책을 평할 때 등장하는 동물은 늑대다.

더구나 싸움을 일삼는 늑대라는 뜻의 전랑(戰狼)이다. 최근에는 이런 기질이 더 번져 자국에 비판적인 오스트레일리아를 물어뜯었다. 와인과 육류 수입을 금지하면서 싸움에 나섰으나 국제사회에서는 거센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소의 해에 생각해보는 중국의 이미지다. 소의 ‘인고’와 ‘인욕’은 결국 품격(品格)의 높음과 낮음을 가르는 척도다. 중국이 개혁·개방 때의 초심으로 돌아가야 좋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꺼낸 소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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