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희·박상영의 우리 뭐볼까?] 찬실이는 복도 많지

김세희 작가 박상영 작가 2021. 1. 1. 03:0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한 장면. 찬란 제공

■창작이라는 블랙홀

‘글쓰기는 내 전부가 아니다’
주문처럼 되뇌는 이유
그것은 나를 세상과 연결
동시에, 단절하게 만들어
참 오묘하고 문제적 관계

작가로 데뷔한 이후 인터뷰에서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언젠가 소설 쓰기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대답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질문이었으나, 그때 내 입에서는 이런 말이 나왔다. 삶은 길고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니, 나중에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글쓰기가 내 삶의 전부는 아니라고.

김세희 작가

확신을 가진 듯 답했지만, 실은 바람에 가까운 말이었다. 어쩌면 스스로에게 주는 경고였는지도 모르겠다. ‘글쓰기는 나라는 사람의 전부가 아니다. 내 삶의 전부로 만들지는 말아야 한다.’ 이 말을 주문처럼 자꾸 되뇌는 이유는 소설 쓰기가 블랙홀처럼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주의하지 않으면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삼켜버리기 때문이다.

김초희 감독의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보면서, 창작의 이 어마어마한 빨이들이는 힘에 대해 생각했다. 주인공 찬실은 영화 프로듀서로 마흔 살이다. 이룬 것도 없고 남자도 없고 돈도 없다. 야심차게 준비한 작품이 제작에 들어가 막 첫 삽을 뜨려던 차에 감독이 갑작스럽게 죽고, 제작사에서도 해고되었다. 찬실은 꿈을 좇는 사이 자신의 인생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제 정말로 영화를 그만두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호감을 갖게 된 연하의 남자 ‘김영’ 앞에서 온통 영화 이야기만 늘어놓고, 길을 걸으면서도 영화 속 장면 같다고 기뻐하는 찬실을 보면서 씁쓸함을 넘어 슬픔이 밀려왔다. 예술이란, 창작이란, 꿈이란 대체 뭘까. 왜 이토록 한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차지해버리는 것일까.

찬실이 호감을 갖게 된 연하남 김영은 단편영화 감독인데, 처음 등장할 때는 찬실과 같은 부류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꿈을 좇으며 이른바 ‘일반인’들의 사회에서 동떨어져 있는 인물. 그러나 영화가 진행되면서 점점 그렇지 않다는 점이 드러난다. 김영 역시 찬실 못지않게 영화를 사랑하지만, 생활비를 벌기 위해 유감없이 다른 일들을 하고, 평온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시나리오를 쓰는 것처럼 보인다.

김영은 찬실에게 말한다. 자신은 영화를 하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 우정을 나누는 것,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 그런 것들도 영화만큼 중요하다고. 이 장면을 보며 나는 깜짝 놀랐다. 이 영화가 예술을 대하는 예술가의 태도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걸 깨달았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면서 글쓰기를 삶의 전부로 만들지는 말아야 한다는 다짐 또는 경고에 대해 생각했다.

예술이냐 생활이냐. 소설이나 시나리오처럼 삶에 밀착한 이야기를 만드는 작가의 경우 이 문제는 좀 더 복잡하다. 창작물과 생활은 긴밀한 연관이 있기 때문에, 생활이 풍성해야 창작물도 풍성해진다. 책상 앞에 앉아 글만 쓴다고 해서 좋은 글이 나오지는 않는다. 단적인 예로 내 경우를 보면, 출산하고 신생아를 기를 때 창작에 엄청난 제한을 받았다. 글을 쓸 시간도 없었고, 체력도 바닥이 났다. 그러나 임신, 출산, 육아 경험은 나라는 존재의 스펙트럼을 넓혀주었고, 내 소설의 스펙트럼도 넓혀주었다.

글쓰기는 나를 세상과 굳게 맺어주는 동시에, 단절하게 만든다. 이 관계는 참 오묘하고 문제적이다. 작가는 세상에 관심을 갖고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지만, 정작 글을 쓰기를 위해서는 연결을 끊고 방문을 닫아야만 한다.

영화 속에서 찬실은 세 들어 사는 집주인 할머니의 삶과 만나고, 김영의 태도와 만나고, 자신의 또 다른 자아처럼 보이는 장국영과 대화를 주고받는다. 이 과정을 거쳐 찬실은 어떤 결심에 이를까. 정말 영화를 그만두게 될까? 이 작품이 어떤 결론을 향해 갈지 궁금해졌다.

영화의 결말은 그냥 말로 해버리면 평범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삶이 있고, 그중 예술도 있다는 것.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라, ‘이것인 동시에 저것인’ 방식을 선택했다. 러닝타임 내내 찬실을 지켜본 관객에게는 자연스럽고도 설득력 있는 결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결말이 공허하거나 억지스럽게 느껴지지 않는 데는 인물들의 건강함도 한몫했다는 생각이 든다. 찬실을 포함해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 나오는 인물들은 ‘건강하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 때문에 찌들고 꼬여버린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씩씩함과 유쾌함을 갖고 있다. 결점이 있지만 건강한 인물들이 얼마나 희귀하고 매력적인지, 이 영화를 보며 나는 깨달았다.

■지난해 우리는 참 복도 없었지

뜻대로 된 게 없었던 작년
여전히 모든 게 불안정…
그럼에도 나는 괜찮다
뜻밖의 일을 겪으면서도
살아지는 게 인생이니까

내가 <찬실이는 복도 많지>라는 제목을 처음 듣게 된 것은 재작년, 한 영화감독님과의 만남 때였다. 내 소설 <대도시의 사랑법>의 영상화에 대한 논의를 하는 자리였고, 그래서 잔뜩 긴장해 있는 상태였다. 대개 업무상 식사 자리가 그렇듯 대화는 곧잘 끊어졌다. 나는 아이스 브레이킹을 위해 ‘올해 가장 재밌게 본 영화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내내 긴장한 표정의 감독님은 그제야 표정을 풀고는 ‘찬실이는 복도 많지’라는 친근한 제목을 말해주었다.

박상영 작가

“그 영화 보면서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

그리고 며칠 뒤, 나는 한 패션 매거진 인터뷰를 위해 강남의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스튜디오에는 수많은 촬영 스태프가 있었고, 아마도 내 앞 차례였을 인터뷰이의 촬영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나는 어색하게 대기실로 들어가 역시나 엉거주춤한 자세로 인사를 하고 내 차례를 기다렸다. 인터뷰용 사진 촬영이 있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이토록 정식(?)의 촬영 현장임을 인지하지는 못했고, 자꾸만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그때 촬영을 마친 키 큰 여성 인터뷰이가 갑자기 내게 저벅저벅 다가왔다. 그리고 경상도 남부 억양이 강한 말투로 외쳤다.

“작가님, 내가 너무 팬입니더. 작품 싹 다 봤으예. 기운 좀 받아도 되겠습니꺼?”

입봉작의 안녕을 위해 내 기운이 필요하다는 그의 말에 나는 좋다고 대답했다. 그는 대뜸 내 팔 한쪽에 손가락을 네 개쯤을 살짝 감았다. 그리고 몹시 부끄러운 표정으로 자신이 곧 개봉할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감독 김초희라고 소개했다. 나는 크게 웃으며 “바로 며칠 전에 감독님 영화가 엄청 좋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제 기운이 쓸모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초대박 치세요!”라고 답했다. 살면서 겪은 우연 중 가장 필연적이고도 유쾌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내 기운을 받아간 김초희 감독의 입봉작은 곧 개봉했고 그때 거짓말처럼 코로나19가 창궐해 전 세계를 뒤덮었다.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찬실은 지지리 복도 없다. 작가주의적 성향으로 널리 알려진 감독의 제작PD로 오랫동안 생활했던 찬실은 별안간 감독이 돌연사해버리고 난 후로 완벽한 실직자가 되어버린다. 찬실을 써주는 제작사는 나타나지 않고, 생활고에 시달리던 찬실은 산동네의 하숙방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으며, 절친한 배우 소피의 집에 가사도우미로 일하며 근근이 생활을 이어나가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소피의 집에서 우연히 만난 소피의 불어 선생 김영에게 사랑에 빠져버리기까지 한 찬실. 그녀의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분투가 벌어지게 되는데.

몹시도 불운하면서도 괴로운, 심지어는 나의 삶과도 많이 무관하지 않은 찬실의 삶을 엿보았음에도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정말 콧물이 쏙 빠지도록 웃었다. 인터뷰 장소에서 만났던 김초희 감독의 유쾌함이 영화에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찬실은 영화 내내 부산 사투리로 엉뚱한 대사들을 쏟아내며, 실제로 김초희 감독 역시 영화 현장에서 제작PD 생활을 오래 했었고, <찬실이는 복도 많지> 시나리오를 쓰던 당시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했다. 분명 코미디의 외피를 입고 있음에도, 찬실이의 인생에 ‘복된’ 일은 단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나는 영화의 말미에 코가 시큰할 정도로 감동했다. 결코 가볍지 않은 상황임에도 ‘까짓거 인생 뭐 있나’ 하는 태도로 그냥 자신의 불행을 껴안아버리는 찬실의 모습에 나는 웃음을 넘어선 어떤 숭고함까지 느껴버리고야 말았다.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그렇듯 내게 있어서 작년 한 해는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때였다. 첫 번째 에세이집을 출간하자마자 코로나19가 세상을 뒤덮었고, 서점은 텅 비어버렸다. 책을 홍보하기 위한 행사와 강연은 모조리 취소되었다. 첫 번째 에세이의 주제가 ‘야간성 폭식증후군과 다이어트’임에도 불구하고 반강제적으로 집에만 있는 통에 살이 더 쪄버렸다. 불면과 조울을 다스리기 위해 먹고 있는 정신과 약의 개수도 비약적으로 늘었다. 앞으로도 이 역병이 얼마나 더 오래갈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이고, 여전히 수입도 불안정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괜찮다. 영화 속 찬실이를 통해, 또 나의 지난 한 해를 통해 나의 ‘불운’과 내가 뜻하지 않았던 모든 것들을 겪으면서도 살아지는 게 인생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가장 보잘것없는 순간에 비로소 알 수 있는 것들도 있으니까.

김세희 작가 박상영 작가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