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신축년 한국 경제, 대통령의 덕목

오관철 경제에디터 2021. 1. 1.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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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20년 한국 사회는 분열의 해, 대립의 해였다. 데이터에 근거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 해법을 모색해야 할 경제현안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부동산, 재벌개혁,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등 주요 이슈마다 진보와 보수는 극렬 대립했다. 남이 뭐라하든 갈 길을 가겠다는 식의 태도를 보여준 집권세력에 책임이 있든, 시대정신은 외면한 채 냉소와 조롱으로 정쟁을 일삼은 세력에 책임이 있든 결국 남은 건 신뢰의 상실과 상처다.

오관철 경제에디터

주택가격 급등에 신음하는 시민, 일자리를 찾지 못해 절망하는 청년, 벼랑 끝으로 내몰린 자영업자까지 민초의 삶은 나아질 수 있을까. 코로나19 사태는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면서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대담하고 창의적인 정책들을 요구하고 있지만 이대로 가면 지루한 공방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경제구조에 파급력이 큰 사안을 두고 여야, 정부와 재벌, 재벌과 노동계, 시민들 사이에 이견이 발생하는 건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접점을 찾지 못하고 끝없는 평행선을 달릴 때 최종 조율자는 대통령이어야 한다. 서로의 간극을 좁히고 금이 간 신뢰가 아물도록 역할을 해야 할 사람은 대통령이다. 역동적 리더십으로 협상가, 중재자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줄 수 있는지가 대통령 업무수행의 중요한 평가 요소가 된다는 얘기다.

이런 틀에 비춰보면 문재인 대통령이 그간 자신의 비전을 각계와 공유하려는 노력을 얼마나 기울였는지, 갈등 조정의 리더십과 소통·설득의 리더십을 보여주었는지는 의문이다. 간혹 대통령의 만기친람이 비판을 부르기도 하나 국정의 모든 책임은 대통령이 짊어져야 하는 게 숙명이다. 청와대 홈페이지에 공개된 2020년 대통령의 경제관련 일정을 보면 스마트시티, 소재·부품·장비 산업현장, 투자협약식 등 이벤트성이 강한 행사 참석과 내부 일정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각계의 쓴소리를 직접 접할 수 있는 자리는 드물었다. 지난 3월 대한상의 회장, 경총 회장, 민주노총·한노총 위원장 등과 함께 주요 경제주체 초청 원탁회의를 열었는데 이런 자리를 더 많이 만들었어야 했다.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재벌과의 대화에 나섰다면 과연 ‘공정경제 3법’이 ‘기업 옥죄는 법’으로 매도당했을까. 경영진 과잉처벌만 부각시키며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무력화시키려는 세력에 ‘사장이 감옥에 가지 않는 게 생명을 지키는 일보다 중요하다는 말이냐’며 대통령이 적극 설득에 나섰던들 지금처럼 법 제정이 난항을 겪고 있을까. “사람이 먼저다. 친구 같고 이웃 같은 서민 대통령이 되겠다”는 집권 초의 초심은 어디로 갔는가. 함세웅 신부와 권영길 전 민주노동당 대표 등 시민사회 원로들이 최근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과 관련해 “국정 최고 책임자인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요청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경제민주화와 경기 활성화 대책을 적절히 배합하면서도 방향성을 놓치지 않으려면 대통령이 논쟁적 질의와 응답이 오가는 공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거시경제에서 부동산에 이르기까지 경험이 많은 원로들을 자주 접하고 재벌 회장들과의 회동도 꺼릴 이유가 없다. 핍박받고 있다는 재계의 인식을 방치해선 안 된다. 현상은 현상대로 인정하되, 재벌개혁이 오히려 재벌을 살리고 경제민주화가 상생경제를 만들 수 있음을 설득해야 한다. 위기에 닥쳤을 때 힘을 하나로 모으는 데 앞장섰던 재계의 전통을 되살리는 건 대통령의 몫이다. 재계와 노동계의 첨예한 갈등을 중재하고 양보와 타협을 이끌어낼 수만 있다면 ‘재계와의 밀월’이니, ‘노동계 편들기’니 하는 시각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부동산 보유세 강화 기조가 왜 시장안정에 도움이 되는지, 세금폭탄론이 왜 부당한지 시민들의 공감을 끌어내는 일도 여당이나 정부에만 맡겨선 어렵다. 불평등한 경제구조 개선과 공동체를 위한 연대의식 회복을 역설해야 하는 건 대통령이다. 사실 어떤 경제가 우리를 행복하게 할지, 한국경제의 나침반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는 답이 나와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찬반이 극명하게 갈리는 문제에 뚜렷한 생각을 드러내며 논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대표적이다. 그는 대통령의 권위에 상처가 날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캐릭터는 각기 다르다 해도 지도자가 어떻게 진정성을 보여주느냐에 따라 경제주체들의 심리는 완전히 바뀔 수 있다. 따뜻한 시장경제를 품에 안고 초심을 돌아보며 현장으로 파고드는 대통령의 모습을 봤으면 한다.

오관철 경제에디터 okc@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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