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새해엔 목소리 담을 '여의도'가 되길 기원한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정치학 교수 2021. 1. 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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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11년의 TV 쇼 <나는 가수다>는 충격적이었죠. 유명 가수들이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감동적이었습니다. 논란도 많았죠. 예술도 경쟁에 몰아넣어야 속이 시원하겠냐는 비난과 탄식이 나왔습니다. 10여년이 지난 오늘, 음악 경연 프로그램은 너무 흔해졌습니다. 워낙 경쟁이 만연한 사회가 됐으니, 그걸 탓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경쟁에 살아남기 위해 고음과 큰 음량을 과시하는 풍토는 여전합니다. 그래서인지 조용한 발라드곡에도 소리 지르는 부분이 꼭 들어갑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정치학 교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큰 목소리로 계속 소리를 질러대는 대표적 정치인입니다. 수탉의 새벽 울음처럼 온갖 주장이 뒤섞인 트위터로 아침을 열죠. 일국의 대통령이 했다고 믿기 힘든 주장, 뻔한 거짓말, 선동을 이어갔습니다. 워싱턴포스트 분석에 따르면 하루 평균 50여개의 거짓말을 한다죠. 전담팀이 애를 써도 다 분석하기 벅차다는 고백마저 나옵니다. 게다가 이 허황한 주장 대부분이 자기 권력과 사리사욕을 위한 말들이었습니다. 그런 탓에 대통령 리더십은 완전히 실종됐고 그 여파는 코로나19 사태에서 극명히 드러났죠. 세계 최고 의료기술, 최대 경제규모를 갖고도 코로나19 방역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습니다. 전 세계 4%에 불과한 미국 인구가 전 세계 코로나19 확진자의 4분의 1을 차지할 정도죠.

전광훈 목사가 그와 비슷한 인물입니다. 태극기집회와 전방위적 여론전을 주도하며 온갖 주장을 거침없이 내뱉었죠. 트럼프처럼 전광훈 목사도 정적을 “빨갱이”로 몰아붙이고, 협박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성소수자, 다른 종교 등 타자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며 세를 모으고, 법치를 비웃으며 사리사욕을 추구한 것도 트럼프와 비슷합니다. 코로나19 위협을 무시한 점도 닮았습니다. “야외에선 전혀 안 걸린다” “병 걸려 죽어도 괜찮다” 등의 선동에 수많은 이가 정부 방역지침을 무시했죠. 결국 광복절집회로 2차 대유행을 선도했습니다.

전광훈 목사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사실 전 목사가 이렇게 활개 친 데에는 일반 지도자들의 행태도 한 요인이었죠. 모두 고함과 삿대질만 해대니 말입니다. 청와대와 여당은 개혁에 목청을 높였지만 어디에 선을 그을지 몰라 우왕좌왕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검찰개혁은 검찰총장 격퇴로 전락해버렸죠. 결국 법무부 장관이 낙마했습니다. 부동산정책도 마찬가지죠. 집값을 잡겠다는 다짐만 요란한 채 시장규제와 공급 사이 줄타기 끝에 장관이 갈렸습니다. 야당은 총선 직후 국민의 뜻을 겸허히 받들겠다는 자신의 다짐마저 잊은 채 다수결 원칙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입법 독재라는 생떼를 쓰며 원 구성, 해양수산부 공무원 피격 논란, 공수처 설치 등 사사건건 고함과 반대로 일관했습니다. 대안이나 제대로 내놓으면 다행이련만 분노만 또렷합니다.

소음이 가득한 이런 정치판에 조용한, 간절한 목소리는 자리를 못 찾고 헤매기 일쑤입니다. 왜 정부가 하라는 대로 문을 닫는데 월세를 계속 내야 하는지, 언제까지 건물주에게 통사정을 해야 하는지 물어도 뾰족한 대답은 없습니다. 건물주는, 그 위 금융권은 어떤 희생을 하는지 궁금하지만 감히 물어볼 수도 없죠.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처리에 미적거리는 이유도 알 수 없습니다. 내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이 시끄러운 정치판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평생 꾸려온 가게 문을 닫는 손, 노동에 피가 터지는 다리를 이끄는 이들에게 검찰개혁과 입법독재는 한가하고 시끄럽기만 한 꽃노래가 아닐까요.

3단 고음에 터질 듯한 가창력의 가수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속삭이듯 가슴을 울리는 가수도 필요하죠. 사회가 가야 할 곳을 논하는 담론이 왜 안 필요하겠습니까. 다만 그 논의가 절실한 삶을 가린다면 아무 소용이 없음을 새삼 되새겨 봅니다. 새해에는 조용한 목소리가 가득 담기는 여의도가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남태현 미국 솔즈베리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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