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자율과 자치의 상상력을 발휘..폭주하는 과학기술, '말머리'를 돌려라 [이광석의 디지털 이후 (25)]

이광석 교수 2020. 12. 31.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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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민주주의

[경향신문]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얼마 전까지도 우리 사회 속 기술 수용은 그리 대중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대중의 기술 체감도 크지 않았다. 여전히 기술은 국가의 일이었다. 정확히는 주로 재벌의 성장 지표에 관심이 많은 엘리트 관료들 소관이었다. 하지만 10여년 전부터 스마트 기술이 일상으로 확산되면서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일반인이 느끼고 감지하는 기술 경험이 확실히 달라졌다.

유튜브에서 먹고사는 일이 청소년 장래 희망 1위로 등극했다. 플랫폼 알고리즘 기술이 노동하는 사람의 생살여탈권을 쥐락펴락하고 있다. 철석같이 믿었던 뉴스와 정보에 대중 여론이 수시로 쏠리고 휘둘린다. 소셜미디어로 맺고 끊는 감정과 정서 관계에 큰 상처를 받거나 우울증에 시달린다. 별점과 댓글이 평판이 되면서 실물 자원들(노동, 집, 식당, 건물 등 부동산)의 질적 가치까지 들썩인다. 디지털 기술이 일상의 조직 원리가 되고, 그 자체가 심각한 사회문제들로 떠오른다.

코로나19 팬데믹이란 재난 변수는 기술의 사회 속 역할을 가속화하고 있다. 바이러스 재난에 맞춘 비대면 원격 기술과 자동화 기술 도입이 크게 늘고 있다. 국민 안전과 바이러스 보건의 방법론으로, 대민 통제형 추적 기술을 사회적 숙의 없이 쉽게 가져오는 경향도 눈에 띈다. 정말 요즘 같으면 우리 일상의 기술 도입 속도에 피로와 함께 멀미가 날 정도다.

지난 몇 년을 더듬어 보더라도 ‘4차산업혁명’위원회, ‘인공지능(AI) 국가전략’ 발표, 코로나19 국면 ‘디지털뉴딜’을 통한 ‘선도국가’ 선언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는 이른바 ‘초기술사회’를 향해 숨 가쁘게 달려가고 있다. 최근에는 이의 촉진을 위해 ‘인공지능 10만 양병’, 유·초·중·고 대상 인공지능 과목 신설, 민간 데이터의 극한 활용을 보장하는 ‘데이터 3법’과 ‘데이터기본법’ 발의 등 국가 계획안들이 끝없이 쏟아진다.

문제는 우리 사회의 기술 가속과 과잉 움직임이 그리 사회혁신이나 ‘기술 민주주의’와 무관해 보인다는 데 있다. 외려 성장주의만을 위하거나 기술의 도구적 합리화 과정에 가까워 보인다. 성장과 효율의 목표를 위한 신기술 폭주로 단순 수렴되고 있다는 점에서 크게 우려스럽다. 첨단 기술로 매개된 우리 사회의 전체 위상이 어떠해야 하는지 깊이 따질 여유 없이, 마치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처럼 미친 듯 질주하는 모양새다.

시민 주도력 강조한 국가 사업들
정작 시민 존재감 미미하거나
정부 과도한 개입으로 오염되기도

■‘시민 주도’ 혁신?

물론 국가가 성장과 효율만을 위해 기술을 도구화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상대적으로 미약하지만, 기술의 사회 안착 과정에 시민사회의 역할을 적극 고려하는 ‘협치’ 지향을 보여주기도 한다. 문재인 정부의 이른바 ‘과학기술 시민참여 모델’은 그 대표적 사례로 볼 수 있다. 이제는 거의 빛바랜 슬로건들이 된 ‘사람이 먼저’ ‘포용사회’ ‘시민 주도’ 등이 핵심으로 내걸린 과학기술 매개형 혁신 정책안이다.

‘과학기술 시민참여 모델’은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등이 소규모 예산 지원을 하고, 시민이 과학기술 의제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관련 전문가들이 특정 사회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시민과 함께 찾아 풀어나가는 협력형 프로젝트에 해당한다. 이슈에 따라 정부 지원을 받아 사회혁신의 해법을 만드는 개방형 과학기술 실험실인 셈이다. 가령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기술·사회 통합 R&D 연구’, 지자체에서 벌여오고 있는 ‘리빙랩’(과학기술 사회혁신 실험) 공모 사업들, 행정안전부의 ‘디지털 사회혁신’ 공모 사업, 한국과학창의재단의 ‘우리동네과학클럽’, 국토교통부의 ‘스마트시티형 도시재생 뉴딜사업’, 서울시의 ‘공유도시 서울’ 사업 등이 대표 사업들이다.

과학기술을 매개로 한 이들 시민 주도 정책 사업의 성과가 어떠한지를 이젠 따져볼 때다. 물론 여기서 사업의 성과를 본다는 것은 이들이 우리 사회 공동선에 질적으로 얼마나 기여했는가를 파악하는 일일 테다. 애초 서로 다른 배경의 과학기술 정책들을 한데 모으고 이를 질적으로 평가한다는 일 자체가 어렵다. 그렇더라도 개별 부처나 기관의 사업 특수성을 넘어 한 사회가 지향하는 기술혁신의 철학과 방향 정도를 수시로 확인하는 일은 중요하다. 이는 적어도 우리 기술 현실의 윤곽을 성찰적으로 읽는 방법이기도 하다.

전반적으로, ‘과학기술 시민참여 모델’은 도시 빈곤, 공해, 미세먼지, 에너지전환, 환경문제, 자원공유, 장애인, 여성 안전과 불평등 등 첨예한 우리 사회의 문제를 들여다보고 시민 스스로 공학적 도구를 갖고 해결책을 찾고자 한다는 점에서 나름 참신했다. 이는 시민 주도형 사회공학 방법론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문제는 사회공학적 해법이 질적 민주주의 실현과 맞물릴 때만 힘을 제대로 쓸 수 있다는 데 있다. 공학적 해법만을 주로 강조할 때 그것의 취약함이나 한계는 분명하다.

실제 많은 국가사업들이 ‘시민의 주도력’을 강조해왔지만, 제대로 된 시민 참여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이를테면, 전문 과학과 기술 지식이 요구되는 경우에 엘리트 집단에 비해 일반 시민들이 주변화되는 경향이 흔하다. 기실 ‘시민 주도’라 강조하지만 시민의 존재감이 별로 없거나 시민의 역할이 크게 부각되지 못하는 혁신 모델인 경우가 많다. 설사 일반 시민과 지역 주민의 역할이 크다고 할지라도, 그 해법 자체가 서툴거나 조악한 경우도 있다. 게다가 중앙정부나 지자체 기관들이 시민 의제에 과도하게 통제력을 행사하면서, 사업 자체의 성격이나 해결책이 오염되는 경우도 많다.

정부 지원 시민 과학기술 정책에 비해 조금 더 자율적 흐름으로써, 풀뿌리 시민사회의 현장 운동 형식도 존재해왔다. 이미 국내에서는 1980년대 중반부터 ‘시민과학’ 운동이 자생적으로 성장했다. ‘시민과학’ 운동은 급진적인 유럽의 기술정치 환경에 영향을 받으면서 과학기술에 대한 시민 일반의 공익 지식 생산과 이를 통한 사회혁신과 개입을 지향해왔다. 예컨대 반공해운동, 시민과학센터 활동, 과학상점, 합의회의, 기술영향평가 등 지역사회, 대학 그리고 시민사회 기반의 과학기술운동 역사가 그것이다. 이들 중 일부는 역사의 뒤안으로 흐지부지 사라져버리거나, 다른 일부는 과학기술 제도나 정책으로 안착되기도 했다. 그리고 일부 시민사회의 유산은 계속 에너지 자립운동, 정보인권운동, 적정기술운동, 기후정의운동 등으로 분화하며 진화를 거듭해왔다.

‘데이터 민주주의’의 흐름 속
데이터·사회혁신 합친 ‘시빅해킹’
미력하지만 국내서 꾸준히 성장

■‘데이터 민주주의’ 변수

시민과학의 역사적 전통은 정부 지원의 시민 주도 혁신 정책에 비해 더 사회 개입적이라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시민과학은 처음부터 사회 정면에서 정부와 기업 감시를 수행하며 생명·생태 교란이나 종 파괴와 연계된 과학기술 문제를 독립된 시민사회의 대안 실천 의제로 다뤘다. 시민사회의 기술 자치와 현장 개입 의지가 꽤 강고했다고 볼 수 있다. 과학기술과 사회 의제에 대한 낮은 주목도나 성장 일변도의 경제 현실을 고려하면, 그 파급력은 미약했지만 말이다. 이전에 비해 오늘 나아진 점은, 그것이 혜택이건 고통이건 우리 대다수가 과학기술의 효과를 일상 깊숙이 체감하는 데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시민 스스로 과학기술의 사회적 문제를 따져보고 이를 제고할 수 있는 ‘시민력’이 고양된 시점에 이르렀다.

필자는 그 긍정적 징후로 이른바 ‘데이터 민주주의’의 최근 흐름을 주목하길 권한다. 더불어 ‘시빅해킹’이란 용어도 흔하게 등장한다. 이들 개념은 시민 자신이 주체가 되어 공공 데이터를 사회혁신의 방향으로 이끄는 활동을 강조한다. 지난해 말 EBS 교육방송이 <시민의 탄생>(2020) 다큐멘터리 기획에서 다룰 정도로 ‘데이터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시빅해킹’은 한마디로 데이터 기술을 사회혁신과 결합하려는 시민사회의 실천 의제로 볼 수 있다. 원래 ‘해킹’은 특정 기술을 뜯어보고 권위에 의해 닫힌 설계를 우회하여 생산된 성과와 지식을 함께 나누고 공유하는 컴퓨터 자유문화를 지칭한다. 여기에 ‘시빅(시민)’이 붙으면서 좀 더 시민사회에 의해 의제화된 사회적 해킹 행위로 개념이 탈바꿈했다.

‘시빅해킹’ 개념이 최근 들어 더 유행을 타는 까닭은, 대만의 해커 출신 디지털 특임장관 오드리 탕의 명성 덕택이 아닐까 싶다. 이미 그는 공직에 발탁되기 이전부터 ‘거브제로(g0v)’라는 시민사회 조직을 만들어 프로그램 개발자들과 커뮤니티 모임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구체적으로 해바라기 학생운동, 타이난 지진, 가오슝 가스폭발, 미세먼지 등 대만의 각종 재난과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데이터 아카이빙과 시각화 등 시빅해킹 활동을 두루 펼친 이력을 갖고 있다. 그는 코로나19 국면에서도 대만 정부의 공공 데이터를 활용한 마스크 재고 정보 플랫폼을 제공했고, 한국 등 여러 나라의 마스크 실시간 재고 앱 제작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에서 데이터 민주주의 혹은 ‘시빅해킹’ 운동이 아직은 미력하지만, 최근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이들의 개입 방향은 주로 정부나 지자체가 만들어내는 공공 데이터에 대한 시민사회, 대학, 비영리 단체의 정보 접근, 공유, 활용을 높이는 쪽으로 맞춰져 있다. 정부나 기관에 대한 재정 의존도를 낮추면서도, 공익 목적의 시민 데이터 권리를 신장하려 애쓴다.

물론 이 또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디지털 해커와 개발자 중심의 전문가 활동이 대체로 중심에 놓이면서, 기술 엘리트주의적 속성을 보이곤 한다. 디지털 코딩 기술을 주 종목으로 삼다 보니 그 인접 영역에서 활동하는 적정기술운동이나 하드웨어 제작문화 등과의 기술 협력이나 사회 연대 고리가 미약하다. 일반 시민 대상 사업 지향으로 인해, 기실 자본주의 기술의 정치경제학 비판이나 실천에 소홀한 측면도 존재한다. 다른 무엇보다 데이터의 사유화와 오남용이 심각한 우리 현실에서 보자면, 데이터의 주류 상업 질서를 직접적으로 거슬러 대안 기술의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는 지금으로선 회의적이다.

기술 과잉 제어할 ‘시민력’ 부족
시민이 현장 감시자로 서는 것
‘기술 민주주의’적 개입과 실천

■‘시빅해킹’ 너머

시민 자율과 자치의 과학기술 상상력을 발휘해 각종 사회문제에 해결책을 제시하는 현장 실험들은 유효하고 장려될 일이다. 다만 우리 사회 주류 질서가 과학기술을 욕망하고 폭주하는 것에 비해, 이를 강력하게 제어하고 기술 대안을 제시할 혁신 실험과 개입의 ‘시민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근본 문제가 있다. 과학기술의 자본주의적 사유화와 반생태적 경향에 ‘시빅해커’와 ‘시민과학자’들 스스로 현장 감시자이자 실천가로 단단히 서지 못하면, 그들의 시민 활동은 그저 조직 내부 기능 개선이나 효율성 확보 정도에 머물 수도 있다.

대만의 탕 장관은 디지털 시대에 스마트 기기를 잘 쓰고 잘 다루는 ‘멀티태스킹’ 능력보다 정보 생산자로서의 능력, 즉 ‘데이터 역량(data competency)’을 강조한다.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문해력(리터러시)이 뭔지를 정확히 지적한다는 점에서 옳다. 하지만 이보다 더 근원적 문제가 있다. 우리 사회에 착종된 자본주의적 기술예속 현실에 대한 시민 대항력의 구성이 그것이다. 이는 동시대 기술권력에 대한 ‘기술 민주주의’적 개입과 실천에 해당한다. 가령 스마트도시 설계 속 약자 포용의 기술 설계, 기술의 보편적 접근권과 공생의 기술감각 마련, 사회적으로 민감한 기술에 대한 시민사회 숙의와 감독, 지역 생태형 적정기술의 장려 등을 동시다발적으로 창안해내야 한다. 이는 내리 앞만 보고 미친 듯 폭주해왔던 과학기술의 ‘말머리’를 돌려 시민 공동의 기술생태를 차분히 모색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광석 교수



테크놀로지, 사회, 문화가 서로 교차하는 접점에 비판적 관심을 갖고 연구와 집필 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IT정책대학원 디지털문화정책 전공 교수로 일한다. 문화이론 전문지 ‘문화/과학’ 공동 편집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테크노문화, 인류세, 포스트휴먼, 플랫폼과 커먼즈, 비판적 제작문화에 걸쳐 있다. 대표 저서로 <디지털의 배신> <데이터 사회 비판> <데이터 사회 미학> <뉴아트행동주의> <사이방가르드> <디지털 야만> 등이 있다.

이광석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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