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희 칼럼] 시보다 아름다운 한마디 말

한겨레 2020. 12. 31.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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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칼럼]
언어는 눈(眼)과 같다. 흐린 눈으로 진실과 아름다움을 투시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한 사회의 타락은 곧 언어의 타락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그동안 공포와 불안을 퍼뜨려 사람들을 두렵게 만든 독재 정권을 여러 번 보았다. 비겁한 침묵을 괴로워하며 보냈던 그 젊은 시간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부끄럽고 아프다.

문정희ㅣ시인·동국대 석좌교수

한 해의 시작이 봄이 아니라 겨울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하얀 눈 위에 미래처럼 새 발자국을 찍으라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유난히 힘든 시간을 견디고 있는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새해 첫발을 내딛는 심정이 어느 성소(聖所)에 들어서듯 사뭇 설레고 조심스럽다.

나에게 가장 소중한 발자국은 언어의 발자국이다. 진정한 어른 됨의 어려움을 실감하는 가운데 놀랄 만큼 무거워지는 나이가 또한 숙연하다.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해마다 어김없이 늘어 가는 나이/ 너무 쉬운 더하기는 그만두고/ 나무처럼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나무는 나이를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도 어른이며/ 아직 어려도 그대로 푸르른 희망/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그냥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무엇보다 내년에 더욱 울창해지기로 했다”

‘나무학교’라는 시에서 나는 이렇게 노래한 적이 있다. 시간은 덧없는 강물이 아니라 나무에 새겨지는 나이테처럼 단단한 옹이가 되어야 한다.

지난해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뜻하지 않았던 전염병에 쫓기면서 매 순간을 겨우 살아냈다.

“너무 많은 부자유/ 너무 많은 마스크/ 너무 많은 불안/ 너무 많은 고립/ 너무 많은 뻔뻔함/ 너무 많은 패거리/ 너무 많은 정치/ 너무 많은 종교/ 너무 많은 거짓말/ 너무 많은 배달/ 너무 많은 성폭력/ 너무 많은 위선/ 너무 많은 적대감/ 너무 많은 카톡…경쟁…무능…소독…쓰레기…우울…”

일찍이 ‘너무 많은 것들’이라는 시를 쓴 미국 시인 앨런 긴즈버그가 살아 오늘 나의 이 패러디를 본다면 고개를 내젓고 돌아섰을 것 같다.

너무 많은 것이 너무 많은 사회는 비정상이다. 이성과 논리가 살아 있고 지성과 과학이 건재한 사회, 무엇보다 언어가 제 가치를 지니고 제자리에 놓인 사회가 건강한 사회이다. 지난해에는 언어가 본래의 의미를 왜곡당한 채 난폭하고 거칠게 사용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언어는 눈(眼)과 같다. 흐린 눈으로 진실과 아름다움을 투시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한 사회의 타락은 곧 언어의 타락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그동안 공포와 불안을 퍼뜨려 사람들을 두렵게 만든 독재 정권을 여러 번 보았다. 비겁한 침묵을 괴로워하며 보냈던 그 젊은 시간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부끄럽고 아프다.

늘 말하지만 정치는 언어로 하는 것이다. 유능한 권력은 정확한 언어로 희망을 보여주어야 한다.

홀로 고립되어 지내며 힘이 들 때마다 나무와 나무의 내면에 새겨지는 견고한 나이테를 떠올려 보았다. 온갖 폭풍과 병균, 위험한 적들의 침입을 견디고 서 있는 나무가 흙속에 내린 깊고 단단한 뿌리도 떠올려 보았다.

역사를 보아도 그렇다. 혹독하고 힘든 시간이 일대 전환의 계기가 되어 새로운 가치를 앞당기는 수레바퀴의 역할을 한 경우도 많이 있었다. 세계 1차 대전과 2차 대전이 뜻밖에도 여성의 사회 진출에 박차를 가한 대전환을 이룬 것도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동안 가사 관리와 육아가 천직이었던 여성이 집 안의 존재에서 처음으로 집 밖으로 나온 때가 바로 두 전쟁을 통해서였다.

전쟁터로 나간 남성들을 대신하여 군수물자와 생필품을 만드는 공장의 기계를 돌리고, 피 흘리는 군인들에게 주사를 놓고 붕대를 감기 시작했던 것이 여성의 사회 진출을 앞당긴 것이다.

오늘날 전 세계를 멈춰 세운 이 불행한 전염병 사태는 어떤 새로운 전환의 계기가 될 것인가, 여러모로 성급한 기대와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새해에는 신문의 언어도 건강한 생명의 언어로 더 많이 채워지기를 소망해 본다. 사건과 사고로 얼룩지고 갈등과 비판의 언어로 가득 채워진 핏발 선 신문이 아니었으면 한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뛰는 생생한 장면 하나를 떠올려 보았다. 2010년 칠레의 지하 탄광에 무려 69일 동안 매몰된 광부들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무사히 지상으로 구출한 후 터뜨린 구조대장의 빛나는 한마디였다.

“임무 완료! 미시온 쿰플리다!” 이마에 흐르는 땀과 함께 토해내는 구조대장의 투박한 그 말은 그날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다. 어떤 시보다 아름다웠다.

지하 700미터 탄광에 매몰된 광부들을69일 동안 손톱이 빠지도록모두 파낸 후구조대장은 소리쳤다 미시온 쿰플리다! 임무 완료!33명의 광부들이 지상으로 살아 돌아온 순간이었다햇살에 땀을 닦으며병아리가 달걀을 깨고 튀어 오르는 줄탁! 같은칠레 광산 구조대장의 말을지상의 TV가 모두 생중계했다천 길 땅속에서 알알이 귀한 시를 캐낸구조대장의미시온 쿰플리다!내 사랑! 임무 완료!그날 지구는 그 한편의 시로 눈부시었다 졸시 ‘구조대장의 시’ 전문

짧은 이 한마디! “임무 완료! 코로나19 종식! 마스크 끝!”

이 말이야말로 오늘 사람들이 가장 기다리는 말이다.

탄광에 갇힌 광부들처럼 숨 막히는 시간에 갇힌 사람들을 무사히 지상으로 구출한 후 이 말을 터뜨릴 구조대장은 누구일까.

백신일까. 대통령일까. 의료진일까. 우리 모두일까.

‘구조대장의 시’를 칠레 산티아고의 테아트로 라 쿠풀라 종합문화공연장에서 낭송했던 기억이 새롭다. 뜨거운 케이(K)팝 경연장 오프닝 무대였다.

칠레는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나라가 아닌가. “지성보다 고통에 가깝고, 잉크보다 피에 더 가까운 시인”이라 했던 시인의 나라 칠레의 젊은이들이 코리아의 케이팝에 열광하는 축제의 자리, 그 젊은 함성과 감격을 언제 또 경험할 수 있을까. 2천여명의 남미 젊은이들이 돔이 무너질 만큼 함께 소리칠 수 있는 날은 얼마를 기다려야 가능할까.

사방에서 망치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하다. 봄도 빠르게 걸어오고 있다.

그동안 견디고 기다린 것밖에 한 일이 없는 겁 많은 내 앞에도 이렇듯 새 캘린더가 펼쳐져 있다. 단단한 나이테도 하나 더 가졌다.

새해, 맑고 정확한 새 언어로 시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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