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단편소설,들 15] 창조주 익스프레스

한겨레 2020. 12. 31.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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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폐지] 초단편소설, 들]#낙태죄_전면폐지_2000자_엽편_릴레이
클립아트코리아

▶바로가기 : <한겨레> 특별페이지 ‘낙태죄 폐지’ http://www.hani.co.kr/arti/delete

10월7일 정부는 임신 주수와 사유에 따라 임신중지를 범죄로 규정한 낙태죄 개정안을 내놓았다. 바로 다음날인 10월8일 오후 에스엔에스(SNS)에 하나의 해시태그가 올라왔다. ‘#낙태죄_전면폐지_2000자_엽편_릴레이’. 전혜진 작가가 제안하고, 문녹주 작가가 해시태그를 만든 뒤 지금까지 20명 가까이 되는 작가가 임신중지와 그 권리를 다룬 초단편 소설을 써 온라인 소설 플랫폼 브릿G와 에스엔에스 개인 계정 등에 올렸다. 같은 주제를 다채롭게 엮어낸 소설들을 작가들의 동의를 얻어 <한겨레> 낙태죄 폐지 특별 페이지에 싣는다.

※ 작품을 원문 그대로 싣습니다.

창조주 익스프레스 ㅣ 0제야

하굣길, 교문 앞에 세워진 트럭.

최신 VR 체험이라고 촌스럽게 써 붙인 그 차만 아니었어도.

내가 창조주를 만날 일은 없었을 텐데.

* * *

나는 아직도 17년 전 그 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학교가 끝나고 애들이 파도처럼 쏟아져 나오던 교문 앞. 그곳에 서 있던 검정색 트럭은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기 어려울 정도로 화려했다. 지나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시대를 앞서 나간 디자인에 박수를 보내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차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같이 교문을 나선 친구들은 트럭을 본 체 만 체 지나가며 제 갈 길을 갔고, 그러거나 말거나 차의 운전석에는 우주에서 가장 한가로운 표정으로 눕다시피 앉아있는 아저씨가 있었다.

평소 VR 같은 데에 관심이 있었느냐 하면 또 그건 아니었다. 놀이공원에 가면 실컷 탈 수 있는 기구들이 있는데 고작 눈속임에 가까운 것을 즐겨 탈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날은 평소와 다른 기운이 세상에 내려앉아 있었다. 유난히, ‘최신 VR’이라는 촌스러운 문구가 멋있어 보였다. VR 체험이 나온 지가 언젠데 최신은 무슨, 이라고 지나가 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햇빛에 번쩍이는 은박과 금박 스티커가 금세 눈길을 사로잡았다. 마침, 롤러코스터를 타지 못하는 민서가 말해준 VR 후기가 떠오를 건 또 뭐란 말인가.

— 나 고소공포증도 엄청 심한데 요즘 것은 울렁임도 많이 없고 재미있기만 하다더라.

어차피 놀이기구를 무서워하지는 않으니 오히려 지루할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학원 수업까지는 딱 두 시간. 한 번에 10분짜리 VR 체험기에 몸을 맡기기에 더없이 충분한 순간이었다.

“아저씨, 얼마예요.”

아저씨는 손님이 찾아온 것이 놀랍다는 듯 화들짝 깨어나 눈과 입 주변에 흘러나온 무언가를 대충 닦았다.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이 좋게 느껴지진 않았지만, 그런대로 괜찮아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VR 기계에 나를 태워서 어디론가 도망칠 사람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너, 진짜 탈 거냐?"

아저씨의 첫 마디는 엉뚱했다.

"네? 아, 네."

아저씨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보았다.

“네가 오늘 첫 손님이니 공짜로 타거라.”

순간 당황했지만, 아저씨가 정신없이 내미는 설명서와 기구들에 떠밀려 어느새 걱정은 저만치 물러났다. 바로 전까지만 해도 진짜 탈 거냐고 묻던 흐리멍덩한 모습이 온데간데 없었다. 미라의 피라미드, 마약상의 롤러코스터 등 설명서에 적힌 전혀 교육적이지 않고 자극적인 이름들을 보며 학교 앞에 이런 것들이 와도 되나 싶었을 즈음, 눈에 띄는 희한한 이름의 체험이 있었다.

—창조주 익스프레스.

‘주님을 뵐 만큼 극한의 공포를!’이라는 타이틀이 눈을 확 사로잡았다. 옛날 성경에나 실릴 법한 고전적인 그림체로 신을 대면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래에 그려져 있었다. 누가 저런 제목을 붙인 거지. 놀이기구라면 E 랜드의 T 롤러코스터까지 섭렵한 나를 이리저리 자극하는 문구였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창조주 익스프레스를 선택했다.

“햐, 이거 정말 제대로 된 애가 왔네."

아저씨는 트럭 문을 열었다. 안에는 푹신할 것 같은 소파와 꽤 큰 크기의 디스플레이가 있었다.

"그래. 잘 선택했어. 그게 요즘 핫한 거야.”

의미심장한 아저씨의 표정을 보았음에도 그걸 선택한 내 잘못이라고 해야 하나.

* * *

아무튼, 나는 창조주 익스프레스에 탑승했다.

VR 장치를 착용하고 나니 화면에 광활한 우주가 펼쳐졌다. 생각보다 느낌이 괜찮았다. 꽤나 진짜 같은 화면을 보며 감탄하는데, 설설 기는 것처럼 속도감도 없던 화면에 갑자기 숫자가 떴다. 그리고는 의자 아래에서 드릉드릉 엔진 소리가 들렸다. 화면에 떠오른 것은 2021년 8월 20일, 그날의 날짜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빠르게 숫자가 뒤로 감겼다. 마치 카운트다운을 하듯 점점 과거의 날짜가 표시되었다.

무슨 일이지.

시간이 정말 거꾸로 흐르기라도 하는 듯 머리가 어지러웠다. 빠르게 감기던 숫자는 2005년 3월 18일에 멈췄다. 어딘가 많이 익숙한 그 숫자는 내가 태어난 날짜였다.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 처음 본 아저씨가 가져온 VR 체험기에 내 생일이 작정하고 뜰 리는 없다는 생각에 머리를 도리질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면서 우연히 내 생일과 같은 숫자를 마주했을 때처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무언가, 기계에서 계산이 되어 정확히 내 생일을 띄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잠시 뒤, 숫자는 한 번 더 바뀌었다.

—2005년 3월 17일.

내가 태어나기 전날이었다.

갑자기 기분이 팍 식어버렸다. 우주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나 공포 체험을 기대했는데 스릴도 재미도 없는 카운트다운이라니. 허탈한 마음에 체험 기구를 벗고 차에서 나가려던 찰나, 어디선가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야. 이거 진짜 누군가 오긴 왔네.”

* * *

나는 헤드셋을 벗으려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정신을 차리고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화면에 카운트되던 날짜는 어느새 지워져 있었고 주위가 조금 밝아진 것 같았다. 내 배를 단단히 조이던 안전벨트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디지털 화면치고는 지나치게 사실적인 풍경이 내 앞에 펼쳐졌다. 책에서 보던, 환한 빛이 감도는 천국 그 자체였다.

그리고 발 아래, 나를 보고 있는 누군가가 있었다. 초등학생이나 되었을까 싶은 어린 애가 작은 가방을 메고 내쪽을 올려다보았다.

“환영해. 여긴 창조주 익스프레스의 종착지야.”

귀에 닿은 목소리가 너무 맑아 간지러울 정도였다. 아이는 나를 보고 방싯, 웃었다.

“눈에 쓴 그거 좀 벗어봐. 이런 건 맨눈으로 봐야 한다고.”

나는 거추장스러운 고글과 헤드셋, 몸을 감싸안은 기기들을 다 벗었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디지털로 만들어진 가짜가 아니었다. 몹시 강하지만 눈을 피곤하게 하지 않는 불빛이 내 주위를 둘렀다.

아이는 어느새 가방에서 꺼낸 서류뭉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리저리 종이를 넘기던 아이는 한 페이지에서 멈추더니 손에 든 종이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이름이……정연? 이, 정연?"

"뭐야. 내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야."

아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내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서류를 계속 보았다. 무안해지려던 차에 아이는 내가 잊고 있었던 이름을 툭, 던졌다.

"요한.”

"응?"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니 요한이라고 불러야 하나?"

아이는 나를 보고 빙긋 웃었다. 다 알고 있다는 듯.

“지금은 네가 태어나기 전날이니 말이야.”

* * *

내 이름은 정연. 2005년 3월 18일에 급히 지어진 이름이다.

원래는 요한이었다. 이요한. 그게 3월 17일까지의 내 이름이었다.

그걸 내 앞에 있는 이 아이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그야 내가 너를 만든 창조주니까."

벙찐 표정의 나를 앞에 두고 아이는 메고 있던 가방에서 태블릿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화면을 이리저리 두드리더니 동영상을 틀어 내 쪽으로 건넸다.

“너 VR 체험하기 전에 설명서 제대로 안 읽었구나? '창조주 익스프레스'. 주님을 뵐 만큼의 공포를 느끼게 해준댔잖아."

"……정말 창조주를 만나게 해준다는 얘기는 없었어."

"그 정도 각오는 하고 탄 거 아니야?"

아이는 내 상황이나 생각이 어떻든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계속했다. 아이가 건넨 태블릿 속에는 두 명의 사람이 있었다. 화면의 선명도가 장난 아니었다. 역시 천국은 디스플레이 품질도 최상인 건가.

"아까 말했다시피 지금은 네가 태어나기 하루 전이고. 이건 지구에 있는 너희 부모의 모습이야.”

그 애의 입에서 나온 말을 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내……부모님?”

“못 믿겠으면 봐. 눈으로.”

화면 안에는 정말 엄마와 아빠의 젊었을 적 모습이 움직이고 있었다.

배가 불룩한 만삭의 엄마와 그런 엄마를 보고 있는 아빠.

요한아.

아빠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왔다.

“진짜……우리 아빠네.”

아빠는 내가 아들이라고 믿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시골에서 고지식하게 자란 그에게 장남의 장손은 아들이어야 했다. 병원에서는 내가 예쁜 공주님이라고 했지만, 아빠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현대의학은 아빠의 머릿속 나를 딸로 바꾸지 못했다. 아빠는 아들을 원했다.

요한아.

아빠는 엄마의 배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는 걸 안다.

“저 때까지도 안 믿다니 진짜 미련하지 않냐.”

아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태어나서 100일이 되도록 누구에게도 보이지 못했다. 딸이었을 뿐 아니라 얼굴에 작은 기형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이것 역시 병원에서 들었던 그대로였다. 코와 입 사이에 그늘이 있네요. 의사는 엄마에게 그렇게 말했지만, 아빠는 기도로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내가 태어난 후. 아빠는 자신의 행동에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다. 오히려 엄마에게 갖은 험한 말을 퍼부었다. 엄마는 나를 낳아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던 아빠로부터 도망쳐 산후조리도 하지 못하며 동생의 집에 얹혀살았다.

화면 안에서 엄마는 배를 쓰다듬는 아빠를 보고 울고 있었다. 기쁨의 눈물이 아니었다.

엄마는 어쩌면, 자신이 딸을 낳았을 때, 아빠가 어떻게 변할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는 내가 태어나기 하루 전이었으니까.

머리에 여러 생각이 떠올라 지끈거렸다. 더는 그 영상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근데 이걸 나한테 왜 보여주는 거야? 여긴 다 뭐고. 난 그냥 VR 체험을 하고 있었을 뿐이야.”

아이는, 아니 창조주는 킥킥 웃었다.

"글쎄, 맞혀봐."

"지금 장난 때릴 기분 아니야."

창조주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기회를 주려고.”

“기회?”

“네가 선택해서 산 삶이 아니라는 거, 잘 알아.”

아이는 태블릿 화면을 눌러 껐다.

나는 허망하게 까매진 태블릿 화면을 보았다.

“삶을 선택해서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흠…….”

아이는 팔짱을 끼더니 곰곰 무언가를 생각했다. 그 후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너는 태어날 예정에 없는 아이였어.”

“뭐?”

"말하자면 복잡한데."

"태어날 예정에 없었다고?"

"그렇다고 잘못 태어났다는 말은 아니야."

나는 갑자기 돌아가는 상황에 어리둥절해졌다. 창조주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 이마를 짚었다. 하지만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인지 심각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잘못 분류된 골칫거리 장난감을 보는 아이처럼 느껴져 우습기도 했다.

“사실 너는 천국의 천사과에 태어날 예정이었어. 근데 전산에 오류가 있었나 봐."

“뭐라고?”

“이게 좀 복잡한데……. 아무튼 우리도 이걸 안 지 얼마 안 됐고, 오늘 널 부른 건, 피해보상 차원이야.”

"17년 동안 그걸 몰랐다는 건 좀 대단한데."

아이는 종이를 한 장 꺼냈다.

“최근 천사과에서 10대 후반 천사가 한 명 부족하다는 연락을 받았어. 네 말대로 이제야 확인했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우리도 모두가 완벽한 건 아니라는 걸 알아줘. 인원을 십 년이 넘도록 확인하지 않고 있었거든.”

종이에는 피해보상으로 인생 선택권을 주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약간 기운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17년 동안 잘 살지는 않았어도 이래저래 버텼는데. 이걸 다시 리셋해야 한다니.

“아, 다시 태어나거나 천사가 되지 않아도 돼. 지금 있었던 일을 머리에서 다 지우고 그냥 VR 체험 한 번 했다 치고 살아가는 선택지도 있어. 그건 걱정하지 말고.”

나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가도 일단 내 앞에 있는 꼬맹이의 말을 듣기로 했다. 그러니까, 모습은 저래도 창조주라는 말씀이지. VR 체험 한 번 하려다가 창조주와의 대면이라니. 아니, 근데 다시 태어난다면, 태어날 집을 선택할 수는 있는 건가.

“내가 어디 태어날지 선택은 할 수 있는 거야?”

“흠……그것까진 할 수 있게 도와줄게. 하지만 지금 행복해 보이는 집에 태어난다고 해서 평생이 행복하지는 않을 수 있다는 거 명심하고.”

“뭐야. 미래를 볼 수는 없다는 거네.”

“전산 오류도 나는 하늘나라에 뭘 바라는 거야.”

“아니, 너무 허술하잖아.”

아이는 입술을 부-하고 내밀었다.

“너희 인간들은 이상해. 처음에는 너희 모두가 아이의 모습이었어. 몸과 마음이 영원히 자라지 않았지. 하지만 몇몇 사람들 주도 하에 어른이 되고 싶다는 움직임이 한바탕 있었어. 그래서 어른이 될 수 있도록 만들었더니 그저 크기에 집착해서 신이란 신은 죄다 북슬북슬한 성인 남정네로 만들어버리지 않나. 욕심이 지나치는 바람에 하늘나라를 뭐든 다 되는 곳으로 바꾸어버리지를 않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여기는 지상이랑 별반 다를 게 없어. 뭐든 다 되는 곳은 당연히 아니야. 단지 시간이 영원할 뿐이지. 그 시간을 잘 활용하는 사람들은 현자가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멍청하게 영원을 살아가. 지혜롭지 못하고 이기적인 이들은 여기에도 있어. 단지 지상을 관리하느냐, 지상에 사느냐의 차이라고.”

“여기도 다를 바 없다?”

“그래.”

나는 계약서를 손에 들고 머뭇거렸다.

“그래서, 어떻게 할래?”

“나 아까 그 영상 한 번만 다시 보여주면 안 돼?”

“얼마든지.”

아이는 태블릿으로 다시 영상을 틀었다. 엄마가 보였다. 볼록한 배를 보며 희미한 웃음을 짓고 있는 엄마가.

나는 문득, 엄마의 웃음을 지켜주고 싶었다. 나는 태어나지 않을 수 있지만, 엄마의 시간은 지금의 나로선 돌릴 수 없는 거니까.

“나 결정했어.”

마음이 편해지고 괜히 웃음이 나왔다.

“생각보다 괜찮은 선택을 했나 보네.”

“역시 내가 태어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이 말을 내 입으로 하자니 기분이 좀 이상했다. 가족들을 다시 못 본다는 게 좀 아쉽지만.

“그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어.”

“뭔데?”

나는 창조주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진심으로 엄마의 행복을 빌며.

* * *

이 일이 있은 지가 벌써 17년이 되었다. 천사과에서의 근무 경력 역시 올해로 17년째다. 나는 지상의 아이들을 위해 즐거움을 만들어내는 시스템을 관리한다.

내가 다시 태어나지 않고 천사과에 근무하는 것에 대한 추가 조건은 엄마가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창조주는 어차피 우리 엄마의 운명에는 결혼이라는 것이 있지도 않았다며 흔쾌히 내 제안을 들어 주었다. 나는 엄마의 모습을 매일 모니터링한다. 엄마는 결혼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나와 에어로빅 강사가 되었다. 엄마가 강사로서 첫 타임을 뛴 날, 문득 내가 살아있을 때 안방 옷장 깊숙이 박혀 있던 엄마의 강사 자격증이 떠올랐다. 색이 바래고 낡은 그 플라스틱 카드를 엄마는 내가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송 선생님, 송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우리 엄마는 지금 50대 후반이다. 서울의 조그만 에어로빅 학원에서 학생들과 수다를 떠는 걸 좋아한다. 그리고, 하늘에 천사가 된 딸이 한 명 있다. 엄마의 따뜻함을 기억하는 천사가 엄마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요즘, 공장에서 즐거움이 남을 때마다 조금 챙겨와 엄마에게 보내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다. 그게 내가 엄마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일 테니까.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은 5월 21일.

엄마의 57번째 생일이다.

<끝>

#낙태죄_전면폐지_2000자_엽편_릴레이 참여 작가 0제야

※ <한겨레>는 작가의 동의를 얻어 작품을 게재합니다. 해당 작품의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으며 저작권자의 동의 없는 무단 발췌 및 전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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