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1인 출판사 여기까지 왔다

이상원 기자 2020. 12. 31.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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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이 선정한 올해의 책 - 2020 행복한 책꽂이
ⓒ시사IN 조남진오월의봄 출판사 직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왼쪽부터 한의영 편집자, 김민수 마케터, 박재영 대표, 이정신 편집장(앉은 이), 조하늘 디자인팀장(선 이), 임세현 편집자.

오월의봄을 올해의 출판사로 꼽은 출판인들의 답변에는 비슷한 표현이 여러 차례 나왔다. ‘꾸준하다’ ‘지속적이다’ ‘일관됐다’ 등이었다. ‘가치 있는 책’ ‘인문학 도서’ ‘소수자 서사’를 계속 내는 데에 대한 평가이다. 가치는 있지만 계속 내기 어려운 책을 꾸준히 출간하는 곳. 오월의봄에 대한 출판인들의 평이다. 오월의봄이 출판인이 꼽은 올해의 출판사로 선정됐다.

선정 소식을 들은 오월의봄 박재영 대표는 “저희가 선정된 게 맞나요? 다른 출판사들이 많은데…”라고 되물었다. 직원 6명 모두가 함께한다는 전제로 박 대표는 인터뷰를 수락했다. 인터뷰에서 대표 본인이 입을 여는 일은 드물었다. 직접 말할 수밖에 없을 때에는 단답으로 김을 뺐다. 올해 가장 반응이 좋았던 책을 묻자 “우리는 책이 많이 나가는 편은 아니다”라고 답했다. 회사 이름을 두고는 “진보적 이슈를 다루고 싶어 광주민주화운동을 의미하는 이름을 붙였는데, 지나고 보니 좀 무거운 이름 같다”라고 했다. 창립 과정에 대해서는 “2011년 1인 출판사로 시작했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라며 ‘요약’했다. ‘말 좀 하시라’는 한 편집자의 말에 그는 “이런 인터뷰를 대표가 하는 게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다. 다른 (직원)분이 말하는 게 훨씬 낫다”라고 말했다. 회사의 지향이나 기조를 두고서 박 대표는 “직원 분들이 말씀하는 게 다 회사 기조다”라며 말을 아꼈다.

인터뷰는 자연히 다른 직원들 위주로 흘렀다. 지난 7월 입사한 한의영 편집자는 오월의봄이 “뚝심 있는 회사, 판매보다 가치에 집중할 수 있는 회사 같아서 합류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표면적이거나 산발적으로 불거지는 이슈에 휩쓸리기보다는 현상 이면을 고민하는 책을 만들고 싶었다는 것. ‘뚝심’은 주제 선정뿐만 아니라 작업 과정에도 적용되는 키워드다. 오월의봄은 올해 대구·경북(〈대구경북의 사회학〉), 개신교(〈대형교회와 웰빙보수주의〉), 마르크스주의(〈마르크스의 생명정치학〉) 등에 집중했다. 코로나19는 다루지 않았다. 임세현 편집자는 “코로나19는 분명 중요한 의제이고, 앞으로 더 부상할 의제이지만 원래 관심 갖던 주제에 집중하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사에서 급하게 기획된 코로나19 관련 서적 가운데에는 아쉬운 책이 많았다”라고 말했다.

편집자들의 주된 관심사는 ‘소수자의 삶’이다. 임세현 편집자는 미셸 푸코의 관점에서 장애를 해석한 〈‘장판’에서 푸코 읽기〉, 장애해방과 동물해방을 함께 조망한 〈짐을 끄는 짐승들〉을 편집했다. 장애학 관련 도서를 한 해에 2종 내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한의영 편집자는 특히 성소수자 문제에 관심이 많다. 그는 “시중에 나온 퀴어 관련 도서는 200종이 채 안 된다. 독자에게 선택권이 없다고 할 정도로 적은 수다. 불씨를 붙일 만한 책을 개인적으로 많이 내고 싶다”라고 말했다.

오월의봄 직원들이 책의 가치에만 치중해 판매를 등한시하는 건 아니다. 설문에서 나온 평을 들은 이정신 편집장은 이렇게 말했다. “사실 ‘꾸준하다’ ‘가치 있는 책을 낸다’는 말의 속뜻 중엔 ‘안 팔리는 책을 만든다’는 것도 있다. 진입장벽이 높은 책만 작업해온 것 아닌지 내부에서 고민이 없지 않았다.” 장고 끝에 올해 오월의봄이 꾀한 변화는 문고본 발간이다. ‘오봄문고’라는 제하에 〈성서와 동성애〉 〈임신중단에 대한 권리〉라는 두 권을 연달아 냈다. 오봄문고는 오월의봄이 그간 제기해왔던 진보적 문제의식은 유지하되, 독자의 부담을 줄일 새로운 트랙을 증설하는 프로젝트다. 편집자들뿐만 아니라 디자인팀에서도 여기 거는 기대가 크다. 조하늘 디자인팀장은 “(오봄문고 시리즈의) 정해져 있는 틀 안에서 변주해볼 디자인을 구상 중”이라고 말했다.

사무실 한구석에 놓인 ‘돈통’

직원들은 업무 환경도 특이하다고 소개했다. 타사에 비해 기획 자율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노동 형태의 자율성도 높다. 오월의봄은 이른바 ‘근태 관리’, 불필요한 감시와 감독을 하지 않는다. 근무 시간은 오전 9시에서 오후 4시30분 또는 오전 10시에서 5시30분 가운데 선택한다. 분위기도 자유로운 편이다. 이정신 편집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 회사는 ‘이렇게 해야 완벽한 편집자야’ 하는 식의 강요가 없다. 완벽한 책을 만들어서 높은 판매고를 올려야 한다는 압박을 편집자에게 가하지 않는다. (출판계 모두가) 편집자도, 편집자와 협업하는 사람들도 사람이고 노동자라는 부분을 서로 생각했으면 좋겠다.” ‘어떤 책을 낼지’는 편집자들의 영역이지만, ‘어떻게 일할지’는 대표의 방침이다. 박재영 대표는 “우리가 노동문제 비판하는 책을 꽤 냈는데, 그걸 우리가 지키지 않으면…. 나는 이 사람(직원)들이 다 좋기 때문에 강요할 게 없고, 내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라고 말했다.

이 회사의 자유분방함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광경은 사무실 한구석에 놓인 ‘돈통’이다. 각종 증빙 작업 등, 업무 중 돈이 필요한 사람은 여기서 꺼내어 쓴다. 철마다 돈을 채우는 사람은 박재영 대표. 비용 정산과 결재 같은 절차를 줄이기 위해 도입한 방법이다. 직원들 사이 형성된 두터운 신뢰와 극단적 실용주의가 밑바탕이 된 ‘제도’이다. 김민수 마케터는 “돈통이 있다고 우리 사정이 풍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월의봄은 마케팅 채널이 다양하지 않은데, 내가 새로운 길을 발굴해서 좋은 노동환경에서도 성공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다”라고 말해 직원들의 박수를 받았다.

일견 시류에 역행하는 곳처럼 보이는 오월의봄도, 유의미한 사회적 흐름을 포착하려고 애쓰는 것은 다른 출판사와 매한가지다. 다만 사회적 소수자의 시각에 역점을 둔다. 임세현 편집자는 “우리 출판사뿐만 아니라 타사에서도 장애와 관련한 책이 특별히 많이 나왔다. 국내 도서와 외서, 고전과 최근 작이 연이어 출간됐다. 질병을 일상적으로 겪는 코로나19 시대와 무관치 않은 것 같다”라고 말했다. 박재영 대표는 “돌봄 문제가 앞으로도 조명될 것이다. 내년에 관련 도서가 나온다”라고 말했다. 발간 도서와 노동환경 양 측면에서 뚝심을 발휘해온 오월의봄이 업계의 갈채를 받고 있다.

이상원 기자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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